전국이 너무나도 우울하다. 버스 안에서, 지하철에서 ‘탄핵’ ‘하야’란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우리는 극단적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70년 헌정사, 30년 민주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국체가 흔들려선 안 된다.
그러려면 박근혜 대통령이 결단해야 한다. 청와대·내각 대폭 쇄신해야 한다.
여야가 합의한 특검에 한 점 감춤 없이 투명하게 응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해야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90초 사과’엔 투명함도 없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변명과 같이 들렸다. 사과문은 최순실이 박 대통령 취임 전후 짧은 기간 연설·홍보문 정도만 관여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최순실은 박 대통령의 일본 특사 면담 자료 같은 기밀정보는 물론 매일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까지 청와대로부터 통째 넘겨받아 국정을 주물러온 정황이 제기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사과문에서 드러낸 것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 수준의 인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특검을 하고 국정조사를 해도 진실이 규명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날 공산이 크다.
그러면 박 대통령은 노도 같은 성난 민심의 쓰나미에 휘말릴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을 맞을 최악의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대한민국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시나리오다.
박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자초한다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이다. 물론 현직 대통령이 특검의 수사를 받는 상황은 본인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 선진국 미국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 인턴과 성관계한 의혹을 놓고 거짓말한 혐의로 탄핵 위기에 몰렸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팀의 수사를 받으며 머리카락이 뽑히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면죄부를 받고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최태민 고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 그림자는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 스며 있다. 최순실은 최태민 목사의 딸이다. 박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의 인연은 40년이다.
인연의 시작은 최 목사의 기발한 편지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에 대한 위로였다.
그는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박대통령 주변을 차기했다. 그의 죽음(1912~1994년) 뒤 공백은 최순실씨가 메웠다.
그 인연은 박근혜 대통령의 기이한 이면이다. 인연은 가혹한 악연으로 끝나간다. 박 대통령은 악연의 늪에서 허덕인다.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의 권위와 평판을 망가뜨렸다. 지금 우리 정부는 혼돈 상태에 있다. 이런 모양의 급전직하는 헌정사상 전례 없다. 지난달 박 대통령은 개헌을 외쳤다. 그때 보인 승부사의 기습 장면과 대비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실패를 단정하기는 아직 이를지 모른다.
공적도 적지 않다. 원칙적인 대북정책, 한·미 동맹 강화, 기초노인연금과 공무원 연금개혁, 불법파업 해체….
그리고 박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건 상당 부분 반대 세력의 책임이라고 본다.
국민들의 충고를 들었다면 반대 세력도 적어졌을지 모른다. 박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아버지처럼 사람을 잘 쓰고, 쓴소리를 들어야 한다.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수사가 성역 없이 이뤄지도록 대통령으로서 모든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독일에 도피한 최순실에게도 즉시 귀국해 수사 받으라고 지시해야 한다. 지금 최순실을 국내로 데려와 수사 받도록 할 수 있는 건 대통령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수사를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최순실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다. 그다음 피해자라면 ‘개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개헌이 필요하다는 당위성, 그 논의를 해나가기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 익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제안하고 바로 그날 밤 최순실 파일이 터져 나오는 순간, 개헌 자체가 오염돼 버렸다.
하지만 개헌은 필요하고 개헌 논의는 더더욱 필요하다. 우리 한국은 지금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위기 국면에 처했다. 권력이 적당히 수습하고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슨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 사태가 대통령 한 사람의 이상한 행동 때문만일까.
뿌리가 훨씬 깊다고 본다. 거의 모든 분야에 스며든 진영 논리가 사람을 가르고 집단을 가르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알면서도 어디서부터 타개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 손을 놓고 있다.
안보는 물론 경제나 산업, 심지어 문화 분야까지도 뼛속 깊이 녹아있는 분열 때문에 어느 정책도 순조롭게 해나가기 어렵다. 국가 진로가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됐다고나 할까.
이대로라면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게 유행처럼 됐다.
다음 5년, 10년도 또 똑같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소진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헌 논의를 서둘러 해야 한다.
이제 대통령이 뒤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된 만큼 현실적 여건은 오히려 좋아졌다고도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통일 이후까지 내다보는 개헌을 준비해갈 수 있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는 그것대로 수습해나가야 한다. 눈을 감은 대통령은 이곳저곳에 부딪쳤다. 급기야 최순실 문턱에 넘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요 10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위대한 기록이다.
국회는 여야가 힘을 모아 넘어진 대통령을 일으켜야 한다. 그냥 놓아두면 이 나라까지 위험하기 때문이다. 국회는 이 나라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고, 이 나라의 미래를 개척할 출중한 지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 주는 개헌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