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이 시를 쓴다면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학평론가
작성 : 2022년 10월 04일(화) 16:58 가+가-

“축구의 차범근이 시를 쓴다면.” 학인의 말이다. 축구는 패스의 정렬(整列)이다.
패스는 순간의 미학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미학자는 축구(Soccer)야말로 스포츠의 시(詩)라 표현했다. 시는 순간의 영감이다. 축구는 순간 패스를 받아 그림 같은 연결을 시도한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인은 그래서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축구는 고도의 집중이다. 발끝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의 집중을 모아 속도의 열(列)을 끌어내는 것들이다.
차범근은 한국 축구가 비 전성기 시절, 독일 축구선수 시절을 보냈다. 독일은 동양의 차범근선수에 대하여 미지의 청년이었다.
차범근은 수도자의 태도로 축구에 임했다. 어둠이 떠나지 않는 이른 새벽 구장으로 나가 구도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끝의 정신을 풀기에 최선을 다한 선수다.
차범근은 축구의 의미는 하나의 선(線)이라 정리했다. 선을 놓치면 생의 맥박을 놓치는 것이다. 시를 쓰면서 언어의 신중 선택도 중요 하지만 운율도 못지않다.
축구는 말로 선을 긋거나 말로 패스를 하지 않는다. 시는 목표를 말하지 않는다.
축구는 어떻게 도달하는가에 말하지 않는다. 축구는 같은 선수와 질투를 하면 연결(선)의 미학이 존재치 않는다.
권일송 시인은 시는 질투하지 않고 화를 참는 것부터 시작된다. 시인은 모름지기 타인의 얼굴을 구경하려 않는다. 차분함 비움 얻는 것부터 실천한다. 과시욕이나 허영의 매체에 접속하지 않는다. 지식인 양아치와 멀리한다. 우리 사회의 졸부 속물의 공간이 지배하는 곳에 가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시와 가까지 하는 길이라 말했다. 지식인 양아치란 실천적 지식을 가지고 천박한 입을 놀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는 방송에 얼굴을 내밀며 ‘천박한 입들의 문화’를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 거명하지 않지만, 유명 소설 작품을 통하여 “너, 전라도지?”라는 ‘유아적 형식’의 손가락질과 턱없이 치졸한 발화법에 대해 “너 빨갱이지” “너 예수쟁이지” 하는 발화에 드러난 중심은 지역, 종교이념을 염두에 둔 문제의 발화법이다. 이문열 소설가와 같이 틈틈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관여하는 형태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졸부와 속물의 공간이 늘어간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런 평가 자체가 무화(無化 없는 것)되는 작은 목소리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희망의 가능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시의 길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통달하여 비범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경탄을 보낸다. 그의 솜씨를 일컬어 신의 경지라 칭송한다. 보통사람의 기량과 비교하여 동뜨게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그 성취가 일회성의 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 적으로 나타난다.
시는 집중의 시간이 건네는 행복이다. 애착의 특성은 참지 못한다. 시는 즉흥성의 동물적인 특성을 경계한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손에 들고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그리하여 신체로 더럽혀진 영혼이라고 주장했다. 달뜬 욕망은 인간의 균형감을 해치고 동물적 상태로 타락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수도하는 마음으로 ‘나’를 조련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집중은 인간이 지닌 의식의 영역을 넘어선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모든 예술과 스포츠의 결과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마음은 눈에서 시작된다. 눈은 발끝이나 손끝에도 있다. 손은 펜을 움직이고 종이에 생각과 사상을 긋는다. 손가락, 발끝은 마음과 눈이라 불러도 좋다. 차범근에게도 발끝과 마음은 집중의 고요가 주는 선(線)의 기량이다. 시인에게 마음을 거두고 맑게 눈을 안정시키는 힘은 집중력의 선(仙)의 세계다. 그렇지만 시는 통쾌하게 실수도 인정한다. 용열(容悅)한 자는 잘못을 인정치 않는다. 노자는 반성은 지혜 자의 덕목이라 했다.
육체를 벗어나 노력이 의식이라면, 의식을 넘어서는 노력에 집중이 있다.
의식의 세계를 잘 못 오해하면 미신과 우상이 존재한다. 한국인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영역에 속한다. 오랜 무속공동체의 존재가 전통처럼 희미하게 성황당(城隍堂) 고개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나타나는 오류들이다.
‘진실이란 하늘의 길이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만의 길이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선을 골라 굳건하게 잡는 것이다.’ (중용 20장)
시(詩) 도반의 흥미로운 발상이다. 혼신의 발끝 수도자, 차범근이 시를 썼다면 분명 문단사에 비중이 큰 시인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차범근 감독이 오늘이라도 시를 써본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