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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나무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학평론가
작성 : 2022년 08월 30일(화) 16:48 가+가-
서인의 쿠데타로 인조반정(1623년 광해군 15)은 성공했다. 5·16의 주역은 서인의 태두인 율곡 생가를 1971년 ‘정화’했다. 강릉 오죽헌은 1971년 전의 축대와 담장의 모양, 계단의 장식도 바꾸어 버렸다.
흙과 함께 숨 쉬어 온 나무도 흔적도 없이 베어버렸다. 흙 위를 덮은 붉은 보도블록 위에는 기념탑이 오른쪽에 세워졌다. ‘율곡 선생유적정화기념비’다. 철거된 건물은 1996년에 복원되었다. 이곳에 자행된 무자비한 성역화 빌미는 폭력의 역사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이이는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탄생지란’ 문구와 함께 5만 원권과 5천 원권이 걸려있는 포토존이 있다.
‘정화 사업’과 ‘세계 최초’라는 문구의 쑥스러운 모자 화폐는 우연일까. 그에 비교되는 세종의 부자도 있다. 허난설헌과 같은 시인도 있다. 다분히 서인 노론의 태두인 이이를 신격화하기 위한 송시열 이래 노론의 집요한 시도도 개입되었다. 정치를 살펴보면 서인의 쿠데타는 과거 완료 형이 아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 아닌가 싶다. 서인이 우뚝 살아나 난치(難治)를 하는 것 같다. 역사의 진실은 사가의 몫이라지만, 실상은 어찌할까.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575년 서인과 동인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선조 8년이다.
백성의 시선에서 보면 서인과 동인의 무리 지은 패거리 싸움은 붕당(朋黨) 정치에 불과하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측과 그에 불만을 품는 분란일 뿐이다. 오늘에 바라보는 정치권도 다르지 않다. 닮은꼴이다. 세력싸움이다.
무슨 놈의 핵을 만드는 붕당이 새로 나왔는지, ‘핵관’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붕당’과 닮았다. 저들은 정의와 공정의 가치라 한다. 국민은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것을 안다. 한심한 것은 그 소리를 믿는 지지세력이 존재한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했다. 세계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것을 두고 한강의 기적이라 하기도 한다. 50년 전에는 최빈국이었다. 쓰러진 경제를 세계의 반열에 우뚝 세웠다.
그와 반대로 빈곤 극치의 정치는 1575년의 서인들이 살아나 폭력을 행사한다. 국민은 누군가 새로운 정치의 메시아를 간절히 꿈꾸기도 했다. 갈아엎어 본다지만 ‘현상’이었다. 의사였고 컴퓨터 바이러스의 권위자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지지해 주기도 했다.
결과는 ‘현상’에 불과했다. 현상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목수는 생나무로 집을 짓지 않는다는 건축의 교과서가 있다. 새 나무라서 좋을 것 같지만 건축재료로서 적합하지 않다. 서서히 말라가는 동안 모양이 뒤틀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변형되기 전의 생나무는 임시적인 목재다. 시간을 들여 변할 곳은 변하게 한 뒤가 아니면 집을 짓는 재료로 쓸 수 없다. 우리는 남들이 100년 걸려서 짓는 집을 50년 만에 지었다.
세계의 사람들이 놀랐다.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우리에게는 ‘제도’와 교과서와 같은 정리된 답이 준비되지 않았다. 그저 성과와 정의라는 답이 전부였다. 생나무는 역시 생나무의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진국들이 집을 짓는 데 100년 걸린 이유는 생나무를 말리는데 50년을 썼다. 그들은 기다렸다. 기다림은 지루하다. 그러해도 나무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필요하다면 바다의 염분에 담아두고 기다리기도 한다. 우리는 말리지 않는 생나무와 같은 건축의 결과로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경험도 했다.
수해의 현장에서 무모한 시민이 반지하 집에서 죽어가는 안타까운 현실도 지켜보아야만 했다. 맨홀에 빠져 죽어가는 아픈 현실도 보았다. 생나무로 건축을 한 것과 같은 결과다. 농부는 비가 오면 논밭의 물꼬가 걱정된다. 두말없이 논으로 달려간다. 농부의 조건 반사다. 할아버지, 아버지 농부도 그렇게 농사를 지었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개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농부가 있다면 하늘이 노하지 않을까.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였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라는 말은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말이다.
정치의 8할은 불행을 다룬다.
뒤집어 말하면 2할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정치는 2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8할의 불행의 시민에 다가서는 선택된 관직이다. 경험과 경륜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둔감한 보통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부분에서 기쁨과 슬픔을 알아채야만 한다. 희열도 모르고 고통도 모르고, 비가 와서 빨랫줄 이불 빨래가 젖는 것에 둔감하면 불행이다.
불행한 채로 행복을 느끼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러한 행복은 지구상에는 없다는 것이 문제다. 불행은 대부분 체제가 만들어 시민에게 주입하는 것들이다.
논리로 불행을 덮을 수는 없다.
이념도 통합도 논리로는 덮을 수 없다.
불행을 덮을 수 있는 것은 검증된 집단에 의한 체제다. 검증된 능력의 지도자만이 ‘덮을 수’도 있다.
정치는 고도의 경험치, 지도력이다. 생나무로 집 짓는 것은 선진 정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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