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대문이 내게 건네는 말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7월 10일(일) 16:43 가+가-

중요한 사실을 허투루 다루면 어떤 식으로든 다치고야 마는 것 같다.
외가에 갈 때마다 문틀이 낮다는 생각을 했다. ‘옛날집들은 겸손하라는 의미로 허리를 숙여서 출입을 하라고 문틀이 낮다’는 말을 들었다. 반가워하는 백구를 쓰다듬으려다 외양간 지붕에 부딪쳤다. 백구가 사는 곳은 본래 소가 사는 곳이었는데 이제 개가 살고 있다. 옛 집은 외양간 지붕도 낮다. 방에 들어서다 문틀에 다시 머리를 찧었다. 처음에 들어서면서 낮은 문 높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면서도 허리를 굽힐 줄 몰라 크게 고통스러운 꼴을 당하고 말았는데 다 내 탓이다.
이 일은 고통뿐인 채로 금세 잊어버렸다가 최근 어느 시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낮은 대문을 보고서 다시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또 다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외가에서 이미 겸손하지 못하여 머리를 두 번이나 다쳤으면서 남의 집 대문을 주인 보는 앞에서 허락 없이 사진을 찍어댔으니 나만 생각하는 겸손하지 못한 모습이 도로 고개를 드밀었음을 떠올린 것이다.
어린 시절 성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선지자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었다. 성서 속 선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홀로 듣고 어리석고 못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베풀어 이끄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즉 세상에서 홀로 옳고 홀로 깨우쳤다고 이야기하는 독선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내 지식의 폭이 넓어질수록 여러 대상에게로 전이되었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저런 선지자가 아닐까?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이야말로 저 선지자의 화신이 아닐까? 정치인 중에 선지자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 혹시 나도 선지자인가?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나머지 네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킨다더니 의문은 오랜 시간을 거쳐 낮은 문에 머리를 박는 나로 돌아왔다. 내 안에 내재된 오만은 언제나 거짓 선지자로서 나설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알고 있다고 믿는 앎에도 이리저리 난처한 질문을 던져보며 진정으로 앎에 도달한 지식인지 스스로 검증할 줄 알아야한다. 큰돈을 투자할 때, 비싼 제품을 살 때 모두들 투자대상을 여러 방면에서 검증해보고 비슷한 성능 혹은 가격대의 제품들을 두고 깐깐하게 비교하지 않는가? 그 깐깐한 검증을 자신의 앎에게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아는 것이 옳음을 어째서 확신하는가? 괴테의 ‘하나의 언어만 아는 사람은 아무 언어도 모른다’는 증언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 앎은 오직 나의 관점에서만 조명되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앎이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철학과 교수가 예술은 집중하고 생각해야만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한다. 집중과 생각은 과정에서든 결과에서든 변화를 낳았을 것이다. 낮은 문도 예술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향교나 서원의 외삼문과 내삼문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중앙에 크고 높은 문이 있지만 큰 문으로는 누구든지 출입을 하지 못했다. 오직 작은 문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 옛 어른들은 허리를 숙인다는 불편함을 곱씹으며 자기를 돌아보고 발전의 계기로 삼았지 않았을까?
외가의 낮은 문을 들어서며 낡은 장판, 냉기가 도는 장판을 보았다. 한때는 뜨끈했던 바닥이 다 삭고 식어버렸다. 하지만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불을 덮고 앉고 때론 누워서 이야기하는 모습은 그대로다. 소가 여물 뜯으며 콧김 불던 외양간을 백구가 차지하고선 옛 주인이 오면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한다. 옥상계단 옆 닭장에는 이제 닭털마저도 날리지 않는다. 집을 굽어보던 늙은 감나무는 이리저리 토막나 몸통만 남았다. 그 세월의 간극에서 나는 어디에 집중했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낮은 대문을 나서려 허리를 숙였을 때 콘크리트 골목길을 보았다. 대문을 벗어나 허리를 폈을 때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서 흘러내려오는 햇빛을 보았다. 흔한 길이고 흔한 햇빛이었지만 낮은 문에 머리를 찧지 않았다면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함부로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런 행위가 때로는 굴복이라는 치욕으로 인식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허리를 숙인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허리를 숙이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생각은 자아를 확장시킨다. 사람을 성장시킨다. 고난과 모험이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류의 진부한 이야기들이 있다. 고난과 모험은 끊임없는 사고로 자기개발을 추구해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닐까?
낮은 문에 수없이 머리를 찧으면서 머리가 아픈 것만을 생각했다. 문이 내게 하는 말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