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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6·25 남침 전쟁
이창용 前 순천대학교 외래교수
작성 : 2022년 06월 27일(월) 16:57 가+가-
72년 전 6월 28일 바로 오늘, 서울은 북한 괴뢰군의 점령으로 공산주의 치하에 들어가 있었다.
다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끔찍하리만큼 몸서리치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6·25를 겪지 못한 세대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들은 생생하게 기억하여 알고 있다. 철저한 교육 때문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남쪽만이라도 간신히 찾았다는 점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들과 16개국 참전 국가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해마다 감사의 인사를 보냄이 마땅하지 않을까? 동방예의지국의 국민답게 말이다. 6·25 남침 전쟁을 생각하자 우크라이나의 현실이 생각나서 마음이 한없이 아프다. 그들의 국민의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위로할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18만 명의 인민군이 609문의 야포와 1,000 여문의 박격포를 쏟아부으면서 272대의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남침을 감행했다.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는데도 국군은 연일 대승을 거두고 있다는 방송만 했다. 의정부가 유린됐을 27일 06시에야 비로소 한 때나마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방송을 했다. 놀란 150만 서울 시민들이 급히 짐을 꾸려 한강교로 몰렸다. 그때 국군은 의정부를 다시 탈환했다며 또다시 승전보를 방송했다.?피난길을 떠나던 일부 시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 시민들은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어이없게도 한강교가 갑자기 폭파돼 버렸다. 다리를 메운 피난민과 국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격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갔던 시민들이 한강으로 밀려와 아수라장을 이뤘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중앙청에 인공기가 꽂혔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빨갱이들이 위장을 하고 있다가 때를 만났다며 북한군 앞잡이가 되어 지도급 인사들을 학살했다. 개전 당시 98,000명이었던 국군은 6월 28일 당시 불과 22,000명에 불과했다. 북괴군 18만 명에는 턱없는 군사력이었고, 그마저 오합지졸이었다. 전 국토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풍전등화 같은 찰나의 상황에서, 천만다행으로 UN의 참전이 결정되었고 16개국이나 되는 자유 우방국에서 앞 다퉈서 참전해 줌으로써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최고 통치권자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 대해 그의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6·25를 회고 하고자한다.
미합중국은 한국전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에게 이런 비문을 바쳤다.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기꺼이 나선 아들과 딸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 합니다.”라고…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밴 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바쳤고, 클라크 UN 사령관도 아들을 바쳤다.
워커 중장이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런가 하면 에티오피아도 너무나 먼 나라, 교류가 전혀 없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애를 실천한 감동을 준 나라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유난히 못 사는 나라가 있다.
바로 ‘에티오피아’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은 에티오피아에 특별히 감사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그것을 누리게 된 배경에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1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였다. 그러자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제네바 국제연맹에 가서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약하고 득 될 것이 없는 나라를 선뜻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작은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고, 1941년 이탈리아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후 유엔이 설립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에서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약한 나라를 도와주자!”라는 ‘집단안보’를 주장했다. 유엔은 세계 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받아들였다. 그 후, 첫 번째로 발발한 전쟁이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6·25’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셀라시에 황제는 ‘집단안보’를 주장하며 유엔에 한국을 도울 것을 강조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왕실 근위대였던 ‘강뉴 부대’를 파병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강뉴 부대’를 파병할 당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를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국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강뉴 부대는 16개국 참전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5차에 걸쳐 6,037명이 참전하였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지구 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달려왔고, 가장 용감히 싸웠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자체 위성 발사, 성공한 7번째 나라답게 세계의 이웃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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