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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시대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6월 19일(일) 16:46 가+가-
1990년 2월 보이저 1호는 명왕성을 지나 태양계의 끝에서 고개를 돌려 지구를 촬영했다. 칼 세이건의 제안에 의해 한 장의 사진이 남았다. 놀랍도록 서정적인 감성의 천문학자. 「창백한 푸른 점」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칼 세이건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첫인상이었다.
그는 0.12픽셀에 불과하게 촬영된 지구사진을 두고 ‘Pale blue Dot’이라고 칭한다. 어느 누구나 아름다운 지구라고 말하는 모행성을 두고 ‘창백한 푸른 점’이라며 인간사에 있었던 모든 희노애락과 부귀영화 등을 ‘태양광에 걸쳐있는 저 티끌 같은 작은 점’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중학생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을 참 인상 깊게 읽었다. 개미는 개미의 생김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생김이 있는데 왜 개미가 인간처럼 사고하는가 하는 소설적 허구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저 작은 개미가 지구라는 개념을 인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같은 상상적 궁금증까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소설이었다.
화성의 하늘이 분홍빛이 난다고 하여 기자들이 야유를 퍼부었다는 칼 세이건의 일화나 누가 봐도 백인인데 유전자검사를 해보니 나이지리아 핏줄이 섞였다하여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미국 경찰의 이야기들은 다름을 거부하려는 보수적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느 미래에 인간이 우주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고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게 될 때에 우리는 지구 출신과 우주 출신이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생각해볼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인류가 지구에 묶여있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불편해도 서로 협의하고 맞춰나가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데 우주로 나가서 밀도가 낮아지고 개인주의화가 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굳이 상대와 틀어지더라도 다른 우주로 떠나면 되니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적어질지도 모른다.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비실용적이고 불필요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만약을 대비하는 동물이지 않은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한 미래를 다룬 SF창작물은 꽤 많다. 개중에 유명한 작품을 꼽아보면 일본의 로봇만화 건담 시리즈는 우주 출신의 인류와 지구 출신의 인류간의 대립을 주제로 한 작품이고 미국의 보드게임에서 시작한 워해머 시리즈는 여러 은하를 개척한 인류가 여러 외계 종족들과 대립을 주제로 하는데, 기술의 손실로 인해 인류간의 교류가 단절되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일반 대중들도 우주시대에 인류간 대립이 발생하거나 기술의 손실로 단절되는 스토리가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고 납득하기 때문에 작품의 팬층이 두터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흔하게 듣는 표현이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요즘 사회는 초고속으로 변화해가고 있으며 변화를 이끄는 것은 기술과 상상력의 실현이다.
최근 수년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의 특징으로 진행 속도가 기하급수적이며 범위가 포괄적이고, 영향이 전반적일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인간의 정체성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왜일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디지털, 생명, 인공지능을 주로 거론하지만 나는 여기에 서비스를 추가하고 싶다. 오히려 서비스가 가장 중심적인 견인차가 아닐까 싶다.
서비스는 받는 대상이 명확하다. 바로 사람이다. 최근 서비스업으로 떠오르는 공유경제산업, 우버, 에어비엔비 등은 차와 집이라는 소유물에 대한 개념을 일부 바꾸었다. 전자통신기술의 활용도 바꾸었다. 이제 시작인데 우리가 가졌던 사회통념을 하나 둘 바꿔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정말로 인간의 정체성에 변화를 주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제조업에서 인간이 설 자리는 계속해서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조업 또한 최종적으로는 수혜 받을 인간이 있어야 존립할 수 있으므로 기술적 영역이 아닌 가치중심적인 영역으로 인간의 노동영역이 옮겨가는 것이고 그 대상이 현재는 서비스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비스업은 인간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4차 산업혁명의 주 무대가 될 것이며 인문학적 상상력이 대단히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체성이 바뀐다면 인문학적 상상력도 바뀌게 될까?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디테일의 변화일 뿐 핵심은 여전할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 본질의 정수를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이 0.12픽셀의 지구를 보고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 참 신선했다.
신선하지 못한 비유가 시적 언어가 아니라 관용구가 되었듯 칼 세이건의 저 비유가 신선하지 못하게 됐을 때 역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정체성을 지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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