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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과 하나님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6월 12일(일) 16:47 가+가-
벌써 5분의 1을 보낸 21세기를 돌아보면, 세계는 종교로 인하여 몸서리를 쳤다. 이슬람 국가들과 기독교 국가들은 침략전쟁과 보복 테러를 주고받았고, 이슬람 국가 간에도 종파 간의 대립과 전쟁을 일삼았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는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가 모여 있으면서도 큰 분쟁과 갈등 없이 서로 잘 지내고 있으니 신기한 가운데 어떤 이유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봉우리와 계곡에 얽힌 설화가 남아있다. 산이라는 자연의 집합이 인간의 터전인 평야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탓에 민간신앙 또한 우리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절에 가면 대웅전 뒤편으로 산령각 혹은 산신각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흰 수염이 고운 노인과 호랑이, 그리고 따르는 인물들이 그려진 탱화를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부처를 모시고 수련하는 절간에 웬 산신인가 싶지만, 인도에서 도래한 불교가 우리 조상들의 민간신앙을 존중하고 함께한 흔적이라 여기니 참 조화롭고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단재 신채호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고 말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정반대인 듯하다. 일찍이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는 앞선 사례와 같이 민간신앙과 화합해서 우리나라의 불교가 되었다. 한때 야소교라고 불리던 기독교는 ‘유일신’의 호칭을 ‘하나님’이라는 토착어와 합치시켰고, 구약의 율법 중 유교 전통과 유사한 경우에는 아예 유교전통을 차용하여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하면서 ‘천주’ 대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우리의 상식에서 종교는 가장 변화에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집단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현지화’를 이루면서, 여러 종교가 서로 공통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부처의 한국, 예수의 한국이 아니라 한국의 부처, 한국의 예수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함께하기 때문에 다름과 함께 동질감도 느낄 수 있어서 여러 종교가 서로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중하며 공존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사례는 많지만, 평화적이면서도 또한 서로 존중하는 상태에서의 공존은 어렵기 때문이다. 언어, 역사적 기억, 문화적 전통, 경제활동 구조 등을 통해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는데, 공동체의 가치관이 형성된 이후에 들어오는 다른 공동체의 가치관이 마찰 없이 공존하기도 어렵고, 공존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의 현안을 한 발짝 떨어져 살펴보면 이런 ‘존중하는 공존’이라는 아름다운 공동체 가치관이 무너지고 점차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사회가 되어가는 모양새여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적으로는 세대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주변국에 대한 혐오가 날로 강성해지고 양지화되어가고 있다.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며 생활양식이 기술에 멱살 잡혀 끌려가니, 신기술을 쉽게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와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는 기존세대 간의 갈등 또한 기술의 격차를 따라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행정체계가 아날로그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을 보고 비웃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늘 지향하는 바가 있어왔다. 사회, 국가 또한 지향하는 바가 있어왔다. 어느 국가는 확장, 어느 국가는 통합, 어느 국가는 평화적 공존. 평화적 공존이라 하면, 모든 갈등과 문제가 해소된 이상향을 떠올리지만, 화목한 가정에도 다툼이 있듯이 그러한 이상향은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이기에 이상향이다. 때로는 다투더라도 의가 상하지 않고 대화로써 화합을 함께 향할 수 있는 정도로 봉합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점점 대화를 잃어가고 있다. 베를린의 장벽도 결국 허물어졌고, 아일랜드의 ‘평화의 벽’은 결국 아일랜드를 완전히 둘로 쪼개버리고 말았다. 필요한 것은 벽이 아니라 회담장의 테이블이었다.
대웅전 뒤에 처음으로 산신각을 세울 생각을 한 스님은 어떤 지극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이제와서 어느 시대의 누구였을지도 모를 분의 깨달음을 전해받을 수는 없겠지만, 다시 그 화목한 깨달음으로 향하기 위해서 수많은 대화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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