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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 읽는다는 것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학평론가
작성 : 2022년 02월 22일(화) 16:53 가+가-
사람은 자연 과학적으로 단 한 번 태어나고 죽지만 시를 읽다 보면 여러 번 태어나고 죽는다.
세포가 다시 성장하거나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사설하자면 어디까지나 인문학적 논리다.
우리가 시를 대하며 앎과 믿음, 감각이 새로운 사고의 변화를 의미한다. 어제 알았던 나의 지식이 시시해질 수 있다. 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산 세상이 오늘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해질 수 있다.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새는 날개로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람을 이용하여 더 멀리 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벌은 밀랍으로 자기의 세상을 만든다.
인간은 말과 글로써, 개념과 자기의 사상, 세계관을 만들어 간다. 그것은 전부가 아닐 수 있다. 한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한계를 넘어서려고 삶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려 한다. 이 같은 일은 과학에서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진행이 된다. 우리는 말과 개념을 바꾸는 일이 시작되고 또 그것을 나타낸다. 그중 하나가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은 시가 되어 우리의 삶을 깨우치게 한다.
책이나 글자를 제외하면 우리는 눈으로 읽기도 한다. 우리가 글을 읽는다는 것은 소리로 바꾸는 것이다. 노래와 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이원좌 시인의 <가시>라는 시를 눈으로 읽어도 보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눈으로 읽는 것과 글자를 소리로 바꾸는 순간 낭독의 즐거움을 느낀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어 외워 낭송하면 그 즐거움은 또 다르게 다가온다.
‘여러 차례 걸쳐/ 비늘을 걷어 냈다/ 칼끝으로 거슬러/ 비늘을 긁어댔다// 그런데도 내 시는/ 아직도/ 비린내가 난다//
눈으로 읽으면 묵상이 된다. 가슴에 조용하게 스며든 기분이다.
과거의 시간이 다가온다.
소리 내어 낭송하면 죄 사함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듣는 사람들과의 공감을 같이한다. 그것을 낭송의 매력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낭송으로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하기도 한다.
아, 나의 죄 썩은 내가 하늘까지 나는구나. 나의 죄를 모두 칼끝으로 비늘을 긁어댔지만 그래도 죄의 비린내는 진동하는구나.
우리는 이러한 시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신앙 시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기독교인만이 나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어떤 시선으로 시를 분류한다는 것은 부질없다. 참회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햄릿> 희곡이다.
형을 살해하고 형수와 결혼한 햄릿의 삼촌, 덴마크 왕의 대사다.
햄릿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자리를 차지한 원수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나쁜 악당이다. 그런 인물이 괴로워 하는 장면이다.
왕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할까?
물론 자기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런데 왕이 진짜 괴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참회하고 벌을 받으면 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
대사에 나왔듯이 살인의 결과인 왕관과 야망 그리고 왕비가 여전히 자기 것이고, 앞으로도 버릴 마음이 없다. 또 인간이 만든 법을 집행한다고 해서 죄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 사실도 괴롭다.
이러한 갈등을 가진 인물, 커다란 죄를 지었고 자신의 죄를 말지만 참회하지 못하는 목소리는 어떻게 내어야 할까? 우리는 인물의 상태, 마음의 갈등을 알맞게 소리 낸다는 것이 소리의 묘미가 된다. 소리를 내어 읽는다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희곡의 백미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읽는다. 노래 부른다. 인간이 입으로 소리를 낸다는 것은 큰 의미가 다가오는 것이다. 목소리는 연상이다.
시에서 말하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시적 화자가 있다.
희곡은 더 나아가 성격을 가진 인물들의 대사로 이루어진다.
시와 희곡의 역사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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