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가는 존재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1년 12월 26일(일) 16:41 가+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를 모를 수는 있어도 이 명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유명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아의 정의를 이보다 더 잘 함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흔히들 나=생각=존재의 삼단논법으로 나=존재라고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생각하는 순간의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므로 생각하는 동안은 자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아는 생각하는 순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보면 생각나는 자아에 대한 또 다른 사유가 있는데, 바로 장자의 호접지몽이다. 호접지몽은 무아사상의 대표적인 고사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는 구운몽을 고등학교 국어에서 가르치기 떄문에 거의 필수적으로 한번씩은 언급하고 가르쳐서 많이 익숙하다.
얼핏 생각하기에 호접지몽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 같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는, 생각은 있지만 나는 없는 무아(無我)를 주장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순간 ‘나’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나는 기억을 통해 판단을 끊임없이 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즉 생각이야말로 내가 남들과 구분되는 ‘나’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고 생각하는 순간만이 내가 남과 구분되는 개인으로 존재함을 확신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과정을 간단명료하고 함축적으로 요약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정의했다.
다시, 나는 ‘기억’을 통해 판단을 끊임없이 해낸다. 이 기억은 어떠한 형태로든 내가 접할 수 있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고, 결과적으로 생각에 방향을 제시한다. 쾌감의 기억은 유혹적이고 좌절의 기억은 불안하고 껄끄러움으로 판단에 영향을 끼치니 결국 ‘나’는 기억을 누적시키며 조금씩 변화해간다. 때문에 절대적이고 고착된 형태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표현과 접근 방법의 차이일 뿐 데카르트의 명제와 장자의 고사는 모두 자아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나’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의 판단을 후회하거나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있다.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그 때의 나와 그 때를 회상하는 나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내가 내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매일 조금씩 새로 교체되는 세포들의 연속인 내 몸이 과연 내 몸인가라는 의문과 같다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같은 존재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사고하지 않고 살아왔고 그동안 읽어온 수많은 책이 내게 전혀 경험이 되지 못했다는 반증이고 무의미한 동물적 일상을 숨이 붙어있는 김에 살았을 뿐이라는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억을 통해 변하는 존재이며 그 기억의 토대가 되는 경험은 그 순간까지의 기억이 판단에 영향을 끼치니 ‘나’라는 자아는 연속성 있는 누적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독서를 끊임없이 권한다. 공교육이 요구하는 고수준의 학업을 쌓는 동시에 경험을 습득하는데는 독서가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이나 신선한 경험을 수시로 접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
사람은 누구나 옳은 판단을 하길 원한다. 심지어 로또라는 지극히 운에 기대는, 옳은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여러 주술적인 믿음이라도 판단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 즉, 판단에는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수많은 판단의 근거는 경험이다. 경험은 기억으로 남는다. 경험이 기억이 되고 기억이 자아를 섬세하게 조각해간다.
어린 시절 푸른 하늘을 보았던 기억은 미세먼지에 더럽혀진 황색 하늘을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게 한다. 푸른 하늘을 기억하는 ‘나’의 자아는 푸른 하늘을 보았던 과거의 경험이 만든 자아의 일면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누구나 사춘기를 거치며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정체성의 의문이다. 어렸던 그 시절에는 의문이 해결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지나갔지만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동안의 내가 만들어가는 다음의 나이다. 매 순간 순간 나는 만들어지고 있고, 생물학적으로 뇌활동이 완전히 멎는 순간에서야 나는 나를 만드는 작업을 멈추고 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