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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위의 예술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1년 10월 24일(일) 16:40 가+가-
세상에는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가수 중에서는 조용필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들었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이게 노래인가 하는 충격이었고 수년 전에 발표한 「바운스」나 「헬로」는 과거의 노래들과는 꽤 다른 새로운 노래였다. 70세가 가까워가는 나이에 더 나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했을텐데 싶어서 그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삶에 수많은 후회가 있지만 가장 큰 후회는 도전하지 않는 삶을 지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왼대퇴부가 골절되어 몇 달간 병원생활과 하반신 깁스를 한 채로 지낸 일이 있었다. 이 때 부모님께서는 이 경험을 글로 정리해보는 것이 네게 자산이 될 것이라고 충고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컴퓨터에 어느정도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적극적으로 자기계발을 해보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미 발견한 글 쓰는 재능이 차고 넘친다는 오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기흉으로 삼년간 세 번 수술을 반복하면서도 어린 시절에 그랬듯 병상일기같은 것은 써보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대학에서도 고등학생때와 마찬가지로 집과 학교를 왕복했을 뿐이다.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가 성장하며 겪었던, 생각했던, 주장하는 바를 글로써 세상에 내놓는 작은 도전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누군가들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조언하지만, 늦은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20년을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고, 7년을 대학에서 허송하고서야 내가 글을 읽고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몇 년을 살지 알 수 없는 내 삶에서도 너무나 큰 시간낭비이지만, 이런 경험이 앞으로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또한 알 수 없으니 지금의 도전이 너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래도 아직은 ‘젊다’는 희망이 내게는 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온실의 화초처럼 아름다운 곳, 점잖은 사람, 규정대로의 절차만을 겪으며 자란 내게는 참 충격적인 경험들이 많았다. 내 상식이 대중의 상식이 아님을 알았고, 모두의 상식이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한참 5·18전야제가 진행중인데 술에 취해 무대로 올라가려는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는 유공자라서 발언할 자격이 있다고 하는데, 유공자는 절차를 무시하고 무대에 난입해도 되고, 말리는 스태프를 때려도 죄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전야행사를 준비하는 중에 금남로 지하상가 상인회의 방문이 있었다. 금남로 4가, 5가 도로를 통제하면 사람들이 지하도로 내려오지 않아서 장사가 안되니 손해를 충당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나는 전혀 그들이 5·18을 다르게 생각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5·18은 모두가 겪은 아픔이니 그들도 당연히 전야행사에 이견이 없으리라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현실적인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공익근무를 할 때 나는 근무지를 한 번 옮긴 적이 있다. 어지간한 일로는 공익요원의 근무지를 재배정하는 일은 없는데 내가 그 어지간한 일을 겪었다. 처음 근무한 곳은 남성장애인재활시설이었는데, 아침 일찍 출근해서 생활인들과 함께 샤워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생활인들이 몸을 씻게 도와주면서 옷을 벗으면 배변을 아무 곳에나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뒤처리를 해야했다. 샤워가 끝나면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하는데, 정신이나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이다 보니 속옷이나 바지에 배설물이 묻은 경우가 많아 따로따로 손빨래를 해서 널어야 했다. 그 인원수가 20명이 넘다보니 혼자하면 거의 오전 내내 해야했다. 점심때는 식탁을 닦고 차리고 보조하고 치우는 평범한 접객을 하였고, 오후에는 ‘작업치료’를 함께 했다.
‘작업치료’는 청소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공장에서 받아와서 조립하는 단순노동이었다. 그런데 이 ‘작업치료’를 할 때 실수 없이 할 수 있는 인원만이 참여했는데, 간혹 싫어서 도망가는 사람이 있는 경우는 억지로 데려와서 살살 꼬드겨야 했다. 어르고 달래기만 하면 다행인데, 가끔 신체적 접촉이 없는 체벌이 가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신체적 접촉이 없다지만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작업치료’ 지시와 체벌은 당시의 내게 있어서 ‘있어서는 안되는 불의한 일’이었다. 시설에 근무중인 복지사가 정신연령이 낮은 생활인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와이어줄로 몸을 묶고 체벌을 실시했다. 이 일이 어떤 경로인지 외부로 밝혀지면서 공익요원들이 그 시설에서 다른 시설로 재배정되었고 나 또한 포함되었던 것이다. 장애인재활시설에서 근무한다면 복지사자격을 취득한 사람일텐데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민단체에서의 경험은 견문이 좁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단체 내에서 글 쓰는 것은 내가 제일 쓸만했다. 누구나 밖으로 드러낼 글문은 초안을 내게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쓸모있다는 느낌이 내게 자신감을 줬다. 하지만 오랜 기간 광주 내에서 벌어졌던 단체간의 신경전은 내가 전혀 몰랐던 세상이었고, 시민단체에 속해서 내가 공익근무를 했던 법인을 바라보게 된 것 또한 신선한 경험이었다. 내가 잘 아는 것은 전공한 국어교육과 글쓰기뿐인데, 사물놀이, 미술, 무대공연, 퍼포먼스 등의 전문가들이 전야제 기획을 위해 여러 차례 토론하는 모습은 낮설면서도 재미있어 보였다. 나 또한 시민총회라는 토론회 개최를 준비했지만 아는 바가 적으니 끌려갈 뿐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많지 못했다. 상무관 전시전의 표지글을 내가 적었지만, 정작 전시물을 보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미술 교양이 부족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초상화를 보고서 ‘아 도청에 계시는 그분들이구나’, ‘꼭 사진같으면서도 어둑어둑한 그림자 같은 느낌이 난다’ 정도의 감상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분했다. 누군가 르네상스를 말하면 서양문학 교양과목에서 배웠던대로 조르주 바사리가 『뛰어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라는 미술비평사의 근간을 마련했다 정도가 내가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식이었다. 누군가 미니멀리즘이 어떻고 다다이즘이 어떻고, 야수파와 입체파가 어떻고 하더라도 간신히 그 의미를 알 뿐 어떤 작품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 시대상이 어땠는지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는게 분했다.
그래서 일을 마친 반 년 간 열심히 읽었다. 미술, 건축, 미술비평, 광고. 책만으로 짧은 시간 접한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일단 내가 도전을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도전을 시작하는 각오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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