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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휴머니즘을 꿈 꾸는가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1년 09월 12일(일) 16:36 가+가-
인간은 언제부터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는 날개장치를 만들어 태양에 도전한다. 제갈무후가 파촉의 험지를 넘나들며 보급하기 위해 목우와 유마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초로 도구를 사용한 이래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 더 나은 도구를 갈망해왔다. 어느 때는 전쟁도구, 어느 때는 의약도구, 어느 때는 가사도구, 어느 때는 농사도구. 혹자는 인간사가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불편한 ‘환경을 개척’하기 위해서 발전한 것이다.
전쟁만큼 불편한 환경이라면 발전한다. 현대사회가 그러하다. 현대사회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모든 인간집단의 모든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그 외의 어떤 이유로.
기계장치는 그런 면에서 볼 때 불편함을 해소하는데 아주 제격인 수단이었고, 끊임없는 발전은 필연이었다. 기계장치는 인간 혹은 동물이 동력으로서 제공하는 힘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일대의 혁명을 맞이했다.
기계 동력의 제공자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된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기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고, 현대에 와서는 인공지능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인간만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지적 활동마저도 이제는 기계가 잠식해갈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2016년,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와 다섯 번의 바둑 경기를 치렀다. 1승 4패의 전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바둑이라는 지적 놀이문화의 정수를 그만큼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현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계의 발전이 특이점을 지나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현재, 우리 인간 또한 특이점을 지나 본질적 가치를 개척해야 한다.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적 혁신과 더불어 4차 산업혁명의 쌍두마차로 바이오테크놀로지를 꼽는다.
괜히 영단어를 조합해놨을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는 모든 영역에서의 혁신을 이름붙인 것이다.
3D프린터 등 기술의 발전이 장기기증자만 찾다 때를 놓치던 안타까운 상황을 해소해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프린터로 장기를 ‘찍어내는 미래’가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윤리적 이유로 다시금 대두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제는 기계도 기억하는 시대이다. 오히려 인간보다도 더욱 객관적이고 정확하고 변질되지 않는 무변의 기억은 인간이 따라갈 수 없다. 심지어 그 기억능력을 통해서 방대한 기억을 쌓고 판단력을 향상시킨다.
이른바 ‘딥러닝’이다. 그렇게 기억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받고 의사결정을 해낸다. 인간의 자아형성과정과 무엇이 다른가?
감정이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유기체로서 태어났다. 동물이다. 때문에 인공지능이 지니게 될 연역적 이성 외에도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는 감성적 이성 또한 지니고 있다. 기계는 절대로 동정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성찰은 자아의 탐색이다. 내 기억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경험이 인상 깊었고, 무엇을 잘하고, 어떤 존재이길 원하는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 무한히 반복되는 탐색의 과정을 거친다. 끝내 결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결론을 낸다. 하지만 광장에 나가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그 결론은 틀린 결론이 되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다.
어릴 때 보았던 영화들 중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라는 작품이 있다. 사랑할 수 있는 아이 로봇이 인간 ‘엄마’에게 사랑받고자하는 이야기인데, 수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꼽고 싶은 하나는 ‘I am. I was.’라는 선언이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었다.’ 혹은 ‘나는 존재한다. 존재했었다.’ 어느 쪽이든 로봇이 최후에 할만한 이야기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가 심사를 복잡하게 헤집어놓는 이유는 감정을 가진 로봇이 과연 인간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기 떄문이다.
영화상에서 등록되지 않은 불법로봇은 폐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감정을 가지게 설계된 로봇이라면 공포 또한 느낄 것인데, 등록번호가 없이 잡히게 된 최후의 순간에 던지는 한마디가 자기 존재의 증명이라니. 기계임에도 잊혀짐을 두려워하는 듯한 인간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에 인간적인 동정과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넓게 본다면 휴머니즘은 ‘인간다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다.
때문에 현대에 존재하는 인간과 관계된 사상들 중 그 어떤 것도 휴머니즘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휴머니즘 또한 미묘하게 개인별로 온도차가 있다.
오직 인간일 수도, 인간 우선일 수도, 인간성을 지닌 모든 것일 수도 있다.
기계가 인간성을 지닌다면 그 기계는 인간으로 대우해줘야할까?
기계는 기계일 뿐일까? 반대로 인간이 인간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 인간은 인간으로 대우해줘도 되는 것일까? 인간성은 과연 무엇으로 정의해야하는가?
아직은 실현 가능성이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이지만,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공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안드로이드가 일상에 들어선다면, 인간의 형태를 갖게 된 그들에 의해 인간의 일자리는 더욱 더 줄어들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늘 그러했듯 빼앗긴 자들은 분노할 것이고 대치할 것이다. 인간성을 지닌 로봇을 인간을 위해 처분할 수 있을까? 콜레라에 걸린 돼지를 살처분 하는 것에는 공중보건이라는 명목을 세울 수 있었지만 로봇의 경우에는 어떤 명분을 세워야할까?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단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확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 공동체의 소속감이 확신을 주는 것일까? 성장기를 여러 문화적 배경에서 보낸 TCK(Third Culture Kids)들은 어디에서 소속감을 갖고 인간을 정의 내리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 밖을 한 번도 나서본 적 없는 짧은 식견으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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