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하면 씨 없는 수박이 떠오른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일본의 농학자가 개발한 수박을 들고 왔을 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우장춘박사의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고 있다.
연 초부터 급진적 이야길 꺼내서 독자에겐 다소 미안한 감이 있다.
그러나 어둠의 역사도 알고 가는 것이 해결의 방안이 된다. 우장춘박사의 아버지는 급진 개화파 장교, 우범선이다.
1985년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조선인 협력자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당시 우범선은 왕실을 지키는 경호 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시간, 우범은 광화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치명적인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우범선은 친일 배신자라는 낙인이 되어 조국에 살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일본인의 협조로 일본으로 마음에 없는 여행길에 오른다. 말이 여행이지 원치 않는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우리는 살다보면 마음에 없는 여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역사는 그러한 경우를 탄생한다. 우범선은 일본 여자,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2남을 생산하는데 장남이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우장춘의 나이 5살 때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이때부터 우장춘의 가족은 떠돌이신세가 된다. 조선에서는 배신자 역적의 가족, 일본에선 이용가치가 없는 쓰레기 트기 가족으로 전락한다. 과부가 된 우장춘의 어머니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겨버린다.
우장춘은 고아원에서 무지막지한 이지메 공격에 시달린다. 그러한 와중에도 우장춘은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돼서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장춘의 어머니도 훌륭했다. 돈을 벌어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대학까지 보낸다.
그냥 대학이 아니다. 명문 동경제국대학을, 도쿄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한 우장춘,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일본은 우장춘을 자유롭게 두지 않았다. 이름을 일본이름으로 바꾸지 않는다고 해임을 당한다. 우장춘은 지방의 농장에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한다. 우장춘은 여생을 그렇게 살수가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
그런 와중에 일제로부터 한국은 해방이 된다. 대한민국은 1947년 농업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던 실력자 우장춘을 ‘같은 민족’ 이라는 명목으로 영입하고자 했다.
한국은 ‘한국농업 과학연구소’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에게 주었다. 우장춘은 감격해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돈 1백만엔의 돈으로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들고 귀국한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부산에서 군복무까지 한다. 당시 높으신 양반들은 군을 가지 않는 현실이었다. 우장춘은 아버지 우범선의 잘못을 치루는 방법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었다.
군복무를 마친 쑥대밭이나 다름없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말이 소장이지 연구소라기엔 너무나 취약한 상황이었다. 전후의 한국이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우장춘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대한민국을 기어이 구원하고 말겠다는 다짐으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않되는 현실이었다.
우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종자 개발에 주력,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종 품목에서 종자를 확보한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현대농업기술이 시작 됐고 기아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다.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우리가 요즘 먹고 있는 제주 감귤도 우장춘이 만든 당도 좋은 역작이다. 감자도 예외가 아니다. 바이러스에 취약하여 한번 창궐하면 전멸하곤 했다. 그 때마다 강원도 도민은 굶어 죽어갔다. 종자를 변형시켜 면역을 가진 강력한 작물로 탈바꿈 시켰다.
역사의 기로에서 우범선의 여행은 한국의 농촌을 탈바꿈한 우장춘이란 농학자를 만들었다. 여행은 뜻하지 않는 역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