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한강은 나가보셨습니까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10월 22일(화) 16:32 가+가-
소설(小說)이 있다면 대설(大設)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대설도 있습니다. 계절 구간을 말하는 소설과 대설은 아닙니다. 지금 아재 개그를 치신가요? 그렇습니다.
현세(현실)가 아재 개그의 시간이 아닌가 해서요. 허허~ 가벼이 하지 말고 칼럼의 본론으로 들러가시죠. 대설은 사서삼경과 같은 근엄한 글입니다. 오늘날의 소설은 픽션, 허구(fiction)라 불리며 출판물을 구분하는 장르로 보시면 맞을 겁니다.
시대가 변하면 소설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세계적 문호라 말하는 도스토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하나의 사례입니다. 소설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소도시, 이 지방의 지주 카라마조프의 집에 20여 만에 아들이 찾아옵니다. 평생 방탕하게 욕정을 좇으며 살아온 호색한 표도르는 두 아내가 낳아준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를 나 몰라라 해 왔어요. 하여간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2권의 1200페이지 분량이며 등장인물의 이름만 외우기도 벅찬 소설입니다.
문제는 이 소설이 당시의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상을 그린다는 점입니다. 러시아의 어두운 이야기지요. 작가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만들어 러시아 정부의 눈에 가시가 될 법도 했어요.
도스토옙스키 그뿐만 아니라 1970년 노벨상을 받은 솔제니친의 소설도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는 옛 소련을 그립니다. 그러다가 솔제니친은 감옥에도 가는 일이 발생 하기도 하지요. 스웨덴은 러시아 정부와 관계없이 노벨상을 줍니다. 이것이 노벨상의 의미란 듯이 말이에요.
소설의 정의가 말하듯 소설은 허구라는 것에도 의미를 떠나 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기후 변화에 나서는 것은 소설을 통하여 환경을 일깨우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듯 소설은 허구 속에 사회를 고발하는 형식도 빌리게 됩니다.
소설을 이념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의 우를 이야기 하시군요. 그래요. 국내로 들어와서 이야기합시다. 대한민국은 늘 노벨문학상에 목이 말랐습니다. 고은 시인이 노벨상의 후보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우리는 발표 날이면 스웨덴 한림원 소식에 귀를 열어 놓곤 했습니다.
지난 10일 밤이에요. 한강 작가의 벼락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이 알려졌어요. 사실 우리에겐 벼락의 소식이었지만 스웨덴에서는 한강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해요. 확실한 것은 아시아 최초 여성 작가니 대한민국 최초니 하는 수식어는 대한민국의 공기를 마취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문학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인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하여 우리 존재의 본질과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깊이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한림원은 한강의 소설에 시의 언어로 빚어낸 아름다움이라 합니다.
단순한 서사를 넘어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흰’과 같은 작품에서는 일상적 사물을 통해 삶과 죽음,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문체는 잔혹한 현실을 다루면서 독자에게 미학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소설의 미학에서 다른 분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한림원이 시적 언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명징하게 가리키고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제주 4·3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맨부커상이라는 영예를 안겼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벗어나 소설 안에서 다루는 폭력의 원인입니다. 그 원인을 ‘인정’하면 소설은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문학은 일단의 처방전과 같은 역할입니다. 방안에 빛이 들어오면 커튼을 칩니다. 그 커튼을 열고, 닫음은 각자의 몫입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 커튼을 가린 데로 두지 않습니다. 스스로 거두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커튼을 거두고 함께 넘어가는 언어의 노래가 필요합니다. 한강을 가보지 않고 한강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강이 시민에 주는 본류를 모릅니다. 네, 읽지 않는 자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에둘러 하시군요.
지금 파주의 출판단지에서는 24시간 인쇄기가 돌아갑니다. 얼어붙은 출판가에 화색이 돕니다. 저녁을 서랍에 넣어둔 작가의 시집을 꺼내 듭니다. 한강을 산책하며 ‘저녁의 검은 잎’을 넘깁니다.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시군별뉴스

오피니언

기사 목록

대한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