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꽃에 진심인 공연예술 공로자
최창일 시인·이미지 평론가·<시화무> 저자
작성 : 2022년 12월 06일(화) 16:55 가+가-

연산군(조선 10대)이 ‘꽃에 진심’인 왕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 있다. 온갖 폭정의 왕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선정을 베푼 22대 정조대왕이 나무를 사랑하고 숲을 가꾸었다는 사실은 <중종실록>이 말하여도 자연스럽다.
김은경 작가에 의해 <정조(正祖) 나무를 심다>(2016년 북촌)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건너편,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이 꽃과 나무를 후원에 심도록 하고, 각종 꽃을 전국 각지에서 바치게 했다는 사실이 낯설다.
무등산의 큰 수박과 같이 귀한 곡물을 임금에게 바치게 한 기록은 많아도 임금이 꽃을 사랑한 기록은 흔치 않다. 대부분 임금이 꽃에 관심을 둔 기록은 없다. 거기에 연산군은 풍류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 시대 원예사와 공연예술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임금이기도 하다. 연산군의 꽃 사랑은 독특하기도 했다. 철이 지난 감귤이라도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올리도록 했다. 일본 철쭉을 “뿌리에 흙을 붙인 채로 올리도록 했거니와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어느 면에서는 협소하게 보이겠지만, 꽃을 지극히 사랑한 임금은 분명하다. 그의 지도로 석류, 치자, 장미, 등 모든 화초에 흙을 붙여 바치고 종류마다 수십 그루씩 올리게 했다. 지친 담당자는 길에서 쓰러지고 죽는 일까지 발생했다.
오늘로 따지면 노동의 혹사다. 권력자가 집착이 심하면 그것은 독재에 속하며 백성에게는 가해자가 된다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같은 교훈이 된다. 우리 궁의 자랑인 경회루를 가장 정성 들여 가꾸고 화려하게 꾸민 임금이다. 그는 경회루 방지 서쪽에 인공섬에 만세 산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월궁 등을 지어 비단에 꽃을 장식하게 했다. 그것은 공연예술에 상당한 발전을 꾀한 정책이다. 우리는 연산군을 폭군으로만 생각한다. 어느 면에서는 연민이 간다.
폐위된 어머니 윤 씨를 복권하려는 과정에서 각료들과 부딪히게 된다. 그 반목은 연 산군의 어긋난 정치의 실마리다. 언로가 막히고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만 필요한 궁중이 되어 갔다. 세상사 사연 없는 일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무고한 백성을 탄압한다는 것은 선정을 벗어난 일이며 용납되지 않는다. 연산군(1476~1506)은 30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 도봉산 자락 방학동 연산군 묘는 한때는 봉분(封墳)은 훼손되고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은 쓰러져 있었다. 비석은 뭉개져 있었다. 주변은 올라다니기 어렵게 잡풀이 무성했다. 인근에 사는 사람도 무명의 묘처럼 방관 되었다. 시도반은 인근에 살았다. 주변에는 토종 닭볶음탕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요릿집이 있었다. 지나치며 연산군의 묘를 봤지만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길이 없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연산군 묘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이 비공개로 관리해 왔었으나 지금은 전면 개방이 되었다.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신 씨, 의정궁주 조 씨, 그리고 딸과 사위가 묻혀 있다. 연산군 부부묘 아래 의정궁주 조 씨라는 팻말에 의문을 갖는다.
의정궁주(義貞宮主)는 연산군의 부인을 이르는 말이다. 궁주, 공주, 옹주, 모두 여자에게 주어지는 작호다. 공주와 옹주는 임금의 자녀다. 궁주는 임금과 살을 섞는 후궁인 여자를 이른다. 부연하면 왕의 여자에게 내리는 작호다. 왕의 여자에게도 계급이 있다. 왕비는 왕과 동격이므로 무품(無品)이다. 빈(嬪)은 왕의 1위 부실(副室)로 정 1품의 품계를 받는다.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정4품 숙원, 정5품 승은 상궁까지 왕의 후궁 품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경국대전에 나와 있지만 궁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연산군의 묘를 안내하는 소개 글에도 궁주에 대한 설명이 없어 묘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묘처럼 되어있다. 세종 시대에 정비된 제도지만 단종 이후 궁주라는 작호는 없다가 연산군의 묘 궁주 조씨 비문에 궁주라는 품계가 기록된 것이다. 왕의 여자로 궁주라는 작호는 <연산군일기>에도 기록이 없다. 역사책에도 상경한 호칭이다. 연산군 묘를 찾는 시민의 궁금증을 덜기 위해 장황한 기록을 설명했다. 이점 문화 재청이 참고하여 자료와 묘비설명 팻말에 안내하는 글을 붙여주면 좋을 듯싶다. 다시 부연하면 이 같은 설명은 알아보기 어렵고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궁주 조씨의 비석에 새겨진 기록이다. 천여 평에 불과한 연산군의 묘역에는 비석의 글씨를 보도록 개방되어있지 않다. 연산군은 2남 1녀를 두었다. 각료들은 앞날의 혼란을 막기 위해 아들들을 모두 사사되게 한다.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지만 가족사와 연산군의 서사를 살피다 보면 연민이 간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연민으로 오해 없길 바란다. 백성보다 꽃을 더 사랑한 연산군, 목적을 잃은 정치는 불행의 최후가 된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