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색에 물들다
최창일 시인·이미지 평론가·<시화무> 저자
작성 : 2022년 11월 22일(화) 16:51 가+가-

베트남 문인들이 경주에서 열리는 한국의 문학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갔다. 문인들 가방엔 낙엽이 한가득 채워졌다.
단풍잎, 은행나무잎이 없는 베트남 문인들에겐 빨강, 노란색 낙엽이 비단처럼 곱게 보였다. 경주의 공원에서 죄책감 없이 마구 자루에 담았다.
은행알을 보고 보석을 보듯 했다. 우리는 은행알과 은행잎은 연관하여 보지 않는다. 그들은 은행 열매를 보면서 샛노란 은행잎을 연상했다. 베트남에 가져간 단풍잎은 대단한 선물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두세 개씩 나누어졌다. 학생들은 책 사이에 넣고 귀하게 보관하고 있다 한다.
시인에겐 가을과 낙엽, 그리고 가을의 열매들은 선물이다. 가을의 단풍은 눈의 선물이기도 하다. 가을 시인에겐 눈을 뜨고 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운 단풍을 눈 속에 가득 담으라는 말일 것이다.
윤동주는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 별 하나의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부분이다.
진주 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언어의 시다. 모르긴 해도 윤동주는 은행나무 사의 별이나 자작나무 사이의 별을 보았을 거라 말하기도 한다. 남이섬에 가면 은행나무를 누워서 본다. 누워서 보는 가을과 은행나무는 다르다. 창문을 열고 보는 것도 좋다. 자전거로 달리며 가로수를 보는 것도 좋다. 가을 기차를 타고 창문으로 보는 가을도 좋다. 그중에 제일은 누워서 가을 단풍을 보는 것이다. 송파구에서는 은행잎 단풍을 해마다 남이섬으로 보낸다.
송파구는 자연스럽게 낙엽을 치워서 좋고 남이섬은 관광객들에게 은행잎 카펫을 밟게 해서 좋다.
은행나무는 괴테를 매료시킨 나무다.
동양에서 처음 본 은행나무는 괴테에게 신천지를 보는 듯했다. 괴테는 은행나무를 독일에 심었다. 그리고 가을날 친구를 불러 포도주 파티를 열었다.
은행나무 아래 포도주는 안주가 필요 없었다. 괴테의 지인은 은행잎을 딸의 결혼식 하객에게 2개씩 선물을 해주는 일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은행잎이 한국처럼 샛노랗게 단풍이 들지 않는다. 샛노란 은행잎은 한국과 동양에서만 누리는 호사다.
한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시간은 동서양이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인생의 고난은 불어 닥친다. 그것들은 가을의 낙엽을 밟으며 털어 내곤 한다. 은행나무잎과 자작나무 껍질에는 천연 방부제가 들어있다.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액자의 켄트처럼 합판에 붙여 그림을 그리면 삭지 않는다.
신라 시대의 그 유명한 천마도도 자작나무에 그렸다. 팔만대장경 일부도 자작나무를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은 부활절에 50일이 지나고 모세의 십계명을 받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자작나무를 장식한다.
자작나무는 연기와 그을림이 없다. 유럽은 그래서 벽난로에 자작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난로에 피우면 자작자작하고 소리를 낸다. 나무 중에 유일하게 죽어서도 말을 하며 시를 쓰는 나무가 자작나무다.
은행잎은 천연 방부제다. 화분에 은행잎을 깔아주면 병충해가 접근하지 않는다. 한 번쯤 실험 삼아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1996년 상영된 <은행나무침대> 영화가 있다. 영화는 몇 가지 독특한 기록을 남겼다. 설 연휴 바로 전날 상영하여 무려 4개월간 장기 상영된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은행나무침대> 영화는 한국에서 최초로 투자금을 받았다.
판타지 영화의 문을 열기도 했다. 무려 열여섯 부분에 상을 받았다. 한국에는 1000년 된 은행나무와 600년 된 은행나무가 전국에 산재하고 있다. 서울에는 성균관대학에도 600년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에서 제일 어른 은행나무다. 두 번째로는 방학동에 은행나무다. 그 어른 은행나무들의 혼령들이 <은행 나무침대> 영화에 응원했다는 소문도 있다.
영화는 중국, 일본, 영국, 독일에 팔려가 선전했다. 역시 은행나무의 위력은 대단했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에서만 열매가 열린다. 짐승과 같이 암컷으로 번식하는 유일한 태도다. 열매는 30년이 지나야 맺는다.
은행나무는 손자 대 가서야 종자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공손수(公孫樹)란 별칭이 붙는다. 신기한 것은 산속에서는 은행나무를 만날 수 없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제일 나이 많은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