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목자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4월 24일(일) 16:40 가+가-

어린시절부터 수많은 소설책을 읽어왔음에도 깊은 감동을 느껴보질 못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작품의 어떠한 면에 감탄하듯이 이야기를 해도 별달리 공감하질 못했다. 그러나 「해리포터」를 보고는 이끌린 듯 영화가 끝나자마자 무등극장 옆 삼복서점에서 전권을 사다가 날밤을 새서 읽고는 읽고 또 읽어 열 번도 넘게 읽었을 때 반해버린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어떤 글에도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습관적으로 읽어서였다. 감동도 공감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 피어오를 듯 하다가다도 사그러든 것이었으리라.
글 속의 상대가 살아 움직이듯 상상하려 했다. 어떤 감촉일지 어떤 맛일지 궁금해하고, 무엇을 보았는지 어디를 갔는지 찾아보고, 어떻게 이겨내야할지 계획을 함께 세우며 읽으려 했다. 영화에서 본 인물들을 떠올리며 읽고 또 읽었던 『해리포터』를 대했을 때처럼.
여러 상상력을 끌어내고 궁금증을 해결하며 책을 읽다 보니 한 권을 읽고 나면 또다른 책이 옆에 놓이길 반복했고, 다양한 분양에서 토막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레 미제라블』이다.
한 사람을 소개하기 위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설명과 묘사, 그리고 묘사를 위한 설명. 5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오직 미리엘 주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할애했는데, 덕분에 장발장을 용서로 구원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선인의 삶이 얼마나 강력한 구원인지. 고교 시절, 교육이라며 수도 없이 매를 맞고 가끔 손찌검을 당하고 울적할 때, 미리엘 주교의 고결함을 찾아 읽으며 구원받은 듯 여기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고교시절 내 방 창 밖으로 성당과 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적막한 밤에 홀로 빛나는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가 못박혀 죽은 십자가가 어째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다시 미리엘 주교의 헌신을 떠올렸었다. 죽음이라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난을 앞에 두고 인류의 용서를 기원했기 때문에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의 상징으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을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 장면이 예수의 죽음과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울지마 톤즈』를 읽고나서 알게 된, 이태석 신부가 만든 『묵상』이라는 성가에는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태석 신부는 이런 불쌍한 이들에게 깊이 연민한 것 같다.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는 더 나아가 의대를 졸업하고도 다시 신부가 되어 평생을 연민하는 이들이 웃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헌신했다.
오직 사람만이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은 수많은 발전의 원동력이며 수많은 감정을 이끌어낸다.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 희망이라는 감정을 심어줬고 발전의 희망을 심어줬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며 인간을 용서하길 빈 것도,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을 용서함으로써 구원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송파 세모녀 사건이 있은 지 8년이 지나고 있다. 당시에는 전사회적으로 정치권을 질타하고 수동적인 행정을 질타했으나, 결국 바뀐 것 없이 사람들의 공감만 마모된 채 지금이 되고야 말았다. 뉴스에서는 빈번하게 유사한 사건들이 단신으로 알려지지만 누구 하나 목소리를 높이질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것처럼 사람은 국가의 규칙을 따르고, 사회의 분위기를 읽고, 주변인의 감정을 읽으며 자신을 조정한다. 이성적인 감성이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 중 공감이라는 감성은 역지사지에서 비롯된다. 대상의 상태를 이성적으로 재단하는 동시에 대상에게 나를 이입하여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너무나도 빠르게 사회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사람은 어느새 자원이 되었고, 사람 간의 정신적 거리가 멀어져서 감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