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고침’의 시간이 필요하다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학평론가
작성 : 2022년 04월 12일(화) 16:58 가+가-

“인간의 내면에는 숫돌 안에 빛이 숨어 있듯이 과학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철학자는 이성을 사용하여 그 씨앗을 끄집어낸다. 시인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씨앗들이 튀어나오게 할 뿐 아니라 빛을 발하게 한다”고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프랑스)는 말했다.
시는 인생의 통찰로,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이다”라고 학인은 말한다. 다른 학인은 “나를 초월 하고 싶어서다. 살기 위한 치열한 정신의 투쟁이다”라 한다.
지하철 안전유리 벽 문, 시를 만난다. 멋진 언어의 집, 시들이 반갑다. 삶의 따뜻한 언어의 기둥들이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시민들에게 정신의 안마를 잔잔하게 해준다.
시를 대표하는 전서(傳書)라면 2천 년 전의 시경(詩經)을 들 수 있다.
공자 시대를 넘어선 당대의 선학들이 만든 시다. 자연, 사랑, 삶을 노래하면서 인간이 가야 하는 길을 청정(淸正)하게 안내한다.
시경 첫 페이지에 <물수리>라는 시는 젊은이가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꾸륵꾸륵 물수리는 황하의 모래톱에 얌전한 아가씨는 그대의 좋은 짝/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 찾고 저리 찾고 얌전한 아가씨를 자나 깨나 구한다네/ 구하여도 얻지 못해 자나 깨나 생각하니 그리워라 그리워라 잠 못 들어 뒤척이네/ 올망졸망 마름 풀을 이리 뜯고 저리 뜯고 얌전한 아가씨를 비파 타며 사귄다네/ 올망졸망 마름 풀을 이리저리 골라내고 얌전한 아가씨는 북을 치며 좋아하네/’
<물수리>(關雎)는 독수리 과에 속하는 조류다. 주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일명 왕저(王(雎)라 한다.
시는 문왕의 아들인 주공 단(周公 旦)이 남쪽 지방에서 모은 노래다.
시 가운데 비파나 북이 나온다.
일반 서민이 아닌 귀족의 청년이 부른 시다. 시의 내용은 3장으로 보이나 운이 달라지는 면에서 5장으로 나뉜 시다. 물론 시경의 한시(漢詩)를 번역한 것이므로 온전한 전달은 아니다. 시경은 우리가 상상하기에 교훈적이거나 어려운 말로 만들어진 시로 상상들 한다.
하지만 2천 년 전의 선비, 선학들의 시를 보면 시를 왜 쓰는가를 다소나마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현대 시와 다른 바 없다.
시는 자연스럽게 기득권의 권력과 잘못된 풍습들을 깨우치려는 목적이 깔려있다. 흔히 이런 것들을 개혁이라고 하기도 한다. 생각의 모험을 지성의 숲으로 불러모아 정돈하고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금은 엉뚱한 예이지만 ‘전기(電氣)’에서 ‘전자(電子)’로 바꾸어 지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전화가 나온다.
전자란 과학에서 가장 가벼운 하전입자다. 이것을 19세기의 전기, 20세기의 전자라 말한다. 전기에서 전자로 바꾸는 현상은 일류 문명에 하나의 혁명이 된다.
시도 이와 같다. 생각의 전기를 생각의 전자로 바뀔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것은 인간의 기득권이 깨지면서 초월의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는 지식을 지혜로 바뀌어 경계를 넘어 새로운 우주로 안내하는 것이다. 시를 읽고 뇌는 어떤 일을 벌일까. 심오한 사유가 철학자의 글보다도 시인들의 글 속에서 더 잘 나타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운 감동을 한다.
애플 창업자 스트브 잡스가 휴대폰을 만들면서 가장 많이 보고 읽은 책이 시집이라 한다. 인생을 ‘새로 고침’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의 고민을 시집을 보면서 덜커덩 아이디어를 얻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시집에서 보았다면 망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최고의 선택, 똑똑한 의사결정을 돕는 것은 결국은 뇌과학의 지혜다. 시를 쓰는 이유는 시에서 인생을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버리기도 하고 누리기도 하는 과정이 디자인이라고 하자. 인문학을 비롯한 시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요즘, 시를 통해서도 세상을 디자인해 가며 또 다른 길을 알게 한다. 우리가 논문을 쓰거나 실험을 하면서 핵심요약하면서 인용하는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는 추상적인 개념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사물은 어떻게 이미지화하느냐에 이해도는 달라지는 것이다. 시는 이미지의 절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는 왜 쓰느냐는 인생의 ‘새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