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래공수거의 유산
강나루 시인·시와사람 편집장
작성 : 2022년 03월 20일(일) 16:46 가+가-

어린 시절 저녁 무렵이면 늘 동생과 함께 TV앞에 앉아 만화를 봤다. 만화 주인공은 반드시 착한 사람이고 다소의 흠결이 있어도 금세 성장의 계기를 놓치지 않고 극복해내 악을 징벌해냈다. 그 중에 내 영웅은 없었으나 일말의 비굴함도 없고 세상에 타협하는 바 또한 없는 일관된 자세는 한없이 크게 보였다. 숫기가 없어 남 앞에 나서길 즐기지 않는 내가, 반에서 친구들끼리 만화 이야기를 할 때는 주도하듯 나섰으니 참 그 주인공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가면서 만화를 보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그 주인공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생 시절에는 어릴 때 보던 그 만화들이 유치했다고도 생각했고, 어린 아이들에게 권선징악을 심어주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수단이었다고도 생각했다.
유튜브 음악을 백색소음으로 삼으며 타이핑을 하던 중 우연히 어릴 적에 봤던 만화를 한 편을 듣게 되었다. 족히 20년은 더 된 투박한 말투와 뻔히 드러나는 클리셰의 서사진행이지만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가는 길이 험해도 결국 뚫고 나아가는 뚝심, 어린 시절 좋아했으면서도 어느샌가 잊고 있던 주인공들의 본질. 현실을 살아가며 인간을 불신하고 나를 불신하고 내 미래를 끝없이 의심하기만 하는 현재의 내게 필요한 덕목을 어린 시절에 이미 수백 번은 지켜봤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자기검증은 끝이 없어야 할 것이다. 끝없이 자기논리의 속으로 함몰되다 보면 결국 세상에게서 문을 걸어잠근 채 홀로 썩어가는 글만을 배설해낼테니 말이다. 하지만 끝없는 자기검증의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검증의 과정에서 내 결함을 발견했다면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지, 믿음을 버릴 이유는 아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옛말은 허무주의자들이 흔히 인용한다. 신해철은 그의 노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에서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라고 질문한다. 그리곤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답할 수 있겠느냐고도 묻는다.
빈 손으로 온 사람이 살아생전 두 손에 움켜쥔 것이 떠나갈 때는 어디로 다 흩어져버리는 것일까? 그저 삶의 방식대로 세상에 남아 내가 어떤 사람이었노라고 증거를 남긴다.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권선징악의 대리인이니 아마도 만화 속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고 신해철은 음악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수많은 곡을 남겼다. 이른바 살아온 그대로의 유산을 남긴 것이지 절대 빈 손으로 떠나간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교사였다.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나도 커서 저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사대에 진학했다. 지금에 와서는 평생 글을 읽고 쓰고 또 읽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가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한지 몇 천 년이 지났을까? 그동안 태어난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그 중에 몇이나 될까?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더라도 삶의 흔적, 유산을 남긴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나도 유산을 남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