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곁에 있었다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11월 05일(화) 16:36 가+가-

시의 역사는 어디서부터인가. 그 시의 역사가 발견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BC 200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유적으로,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 Gilgamesh Epoth(길가메시 서사시) > 라는 시이다. 길가메시라는 한 영웅의 모험을 찬양하는 내용의 서사시다.
동양에서 시의 역사는 공자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시경 詩經>(305편의 시)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로부터 동주(東周)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 동안의 노래들을 모은 것이다. 오래된 시는 BC 1000년경의 것도 있겠다. 시경의 원래 이름은 시(詩)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는 시경(詩經)이 되었다. 경을 붙이는 것이 옳다 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도 시경을 처음에는 다소 가벼이 여겼으나 동서양에서 높은 평가의 시로 구분하면서 달라진 태도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시의 역사는 시가(詩歌)를 든다.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인데, 제작 연대를 BC 17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조가는 고구려 유리왕이 아내 치희를 그리워하며 만든 시다.
우리 시가의 역사가 기록으로 늦은 것은 우리 민족이 시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뒤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우리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다. 우리의 번창한 ‘노래방’ 문화가 하나의 증거다)
기록은 이렇게들 남아 있지만, 문자를 사용하기 전의 노래들까지를 시의 남상(濫觴)(사물의 맨 처음)이라고 본다면, 시의 역사는 만년을 헤아리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 유구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시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변해왔는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피면 우리나라 시조의 출발은 샤먼 무격(巫覡)의 주사(呪詞) 곧 ‘천지신명께 기원하는 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조가(黃鳥歌)>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고대 시가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의 향가(鄕歌)를 거쳐 고려의 가요(歌謠) 그리고 조선조를 지내면서 시조(時調)와 가사(歌辭) 문학 등으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시가는 늘 우리 민족의 곁에 있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수루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에 잠겨있을 제 어디서 한 가락/피리 소리 다시 시름을 더하는고’ 이순신 장군의 시조 <한산도가> 전문이다.
이근배 시인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를 좋아하는 시조라며 소개한다.
<한산도가>는 싸움에 임하기 전에 장군은 얼마나 무서웠고 불안했을지 가늠이 가지 않는 장면을 묘사한다. 우리의 선조는 생활의 일상을 시조로 노래하는 장면을 알 수 있다. 고려 이후부터 구한국 말에 이르기까지 시 장르의 본령은 한시(漢詩)가 점령해 왔다.
우리 고유의 시는, 거의 노래와 함께 공존해 온 상태다. 우리 시가 노래로부터 독립된 것은 20C에 들어와서부터다. 20C 초에 싹이 텄던 소위 신체시가 자유시로 자리 잡은 것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적 특성을 지닌 자유시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한 지역에서의 시의 변천하는 모습도 이렇게 세계의 지역에서 변모해온 시의 양상을 살펴본다면 복잡하고 다양하다. 천 년 전 당나라의 이백(李白)이 생각했던 시와 백 년 전 독일의 릴케가 생각했던 시의 거리는 넓었다. 사람의 거리에서 같이 걷고 있었다.
동시대의 시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다 다르다. 서양의 시와 동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서구라도 프랑스의 시와 영국의 시가 같지 않다. 같은 동양이라도 중국의 시와 한국의 시가 같을 수가 없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이라고 해도 개인에 따라 차이가 컸다.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소월(素月)과 이상(李箱)의 시가 얼마나 다른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동안 역대의 시인들과 시 이론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의 정의를 해 왔다. 그러나 그 정의들 가운데 교과서적인 정의는 없다. 그래서 시의 교본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들이 내린 정의는 다만 그가 살았던 당대의 그가 체험한 시에 대해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앞으로도 시공을 초월, 시에 대하여 정의를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시는 사람의 곁에서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