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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새벽의 약속이었다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학평론가
작성 : 2022년 09월 27일(화) 16:46 가+가-
한 통의 전화다. 아테네다. 아무런 말이 없다. 말이 없다기보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지만 하얀 장미와 같이 뇌는 순간 하얀 향기로 흩어지는 것이다.
꼭 10년 만의 목소리다. 싸늘한 초가을의 바람이 문틈 사이로 불어온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젠과 이별의 시간은 가을의 새벽이었다. 그 가을은 마음을 끓이는 시간으로 족했다. 정말 사랑하고 존중하여도 가을의 결별은 나무들이 비틀거리는 시간이다. 나무들은 1년을 가슴에 담고 살지만 흩어지는 시간은 순간이다.
사랑도 단풍이 든다는 것은 진리였다.
여름의 끝에서 멈춘 듯 단풍은 영글지 못했고 비는 아침저녁으로만 간간이 내렸다. 어느 날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앙상해 버린 나무들이 곳곳에 발견되기도 했다.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을 산에 왔다가 비를 더 사랑하게 될 그런 날이 되기도 한다. 비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 변명과 같다. 그날은 유난히 가을 새들이 떠나는 재촉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는 잭 갠 필드의 말은 진실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사람이 지혜를 나누고 남과 나눌 줄 안다는 것은 어른이다”라는 레이프 에스퀴스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허구의 말이었다. 정말이지 젠과의 시간이 지혜를 나누고 지혜를 덜어주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망각의 기술과 힘은, 현재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의식 바깥으로 몰아낸다. 또 의식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맹렬한 열정이나 위대한 이상에 사로잡히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오로지 그것만 듣고 보인다.
니체의 말처럼 사랑은 일종의 초월적 상태다. 정신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한곳에 몰입된 상태다. 이런 상태는 비단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미술가, 운동선수, 음악가, 무용가, 기도에 몰입한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바로 이런 순간에 가장 커다란 행복이 온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몰입의 순간을 시간의 해방이라는 말을 한다.
젠은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러다가 만나고 싶다고 한다. 찰나(刹那)라는 말이 있다.
어떤 현상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말한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인공위성이 오르는 순간처럼 위기와 환희가 겹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찰나에 수많은 결론이 내려지고 있었다. 아니다. 기다. 만나자. 아니다.
두 가지의 결론 속에서 수많은 선택처럼 부산하기 이룰 때 없다.
찰나의 결론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은 미처 몰랐다.
공초 오상순 시인은 “일찍이 인생이 낙관하기에는 너무나 슬프고, 비관하기에는 너무나 즐겁다. 슬픔과 기쁨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난 자리에 허탈만 남는다”했다.
허탈을 주었던 젠의 전화는 환희와 비관이 겹치기에 충분했다.
젠은 진정한 용기는 마음의 오묘로운 구석에서 빚어진다는 것을 행동의 사랑으로 보여주었다. 가변적인 사물이 지니는 영욕(榮辱)과 애환(哀歡)을 떠나 청정한 심정의 조화 속에서 삶의 참 기쁨과 에너지를 주었다. 아무리 첩첩의 인생길이 온다 하여도 의미가 부여되고 일상의 보람을 찾도록 애쓰는 영혼의 수프와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다, 사랑은 안개 속의 무진마을(없는 마을)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방은 불모지에 섰으면서도 ‘저쪽’에 있는 ‘나’에 희망을 걸고 삶을 이어나가려는 신념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을 속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선물일 수도 있다. 분명, 사랑은 불모성(不毛性)에서 내면경(內面境)의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다.
젠의 전화를 받고 인생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은밀하고 희망적인 논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학인은 세상을 신용하고 있었다. 내 운명에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속에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을은 늘 그렇다. 무수한 사랑의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 다시 돌아오는 약속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어린 모모가 사랑 없이 살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한 노인의 대답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 같다. “불행히도 그렇다”라고.
가을은 ‘새벽의 약속’이다. 새벽의 약속은 뒷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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