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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은 한국 가요사의 기원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10월 29일(화) 16:53 가+가-
한국 신시 시작은 1910년으로 본다. 신시는 한국 가요사와 밀접하다. 한국 가요사는 1930년대 중반 <목포의 눈물>이 나온 때를 기원으로 삼는 것이 정설이다. 이혜숙, 손우석의 <한국 대중음악사> (리즈앤북 2003)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는가/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은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 출신의 이난영이 불렀다.
목포의 눈물은 그 자체로 시적인 가사다. 김지하 시인은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바다다/ 목포는 눈물이다/ 목포는 사랑이다// 삼학도 떠나는 배/ 유달산 달 밝은 밤/ 노적봉 등대 아래/ 우는 목포의 사랑’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난영의 노래와 관련은 없지만, 목포는 항구와 그 정서의 결을 같이한다.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의 지명은 목포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굳이 가사를 분석하지 않아도 구절의 모서리마다 뱃노래가 들리고 파도 소리가 귓전을 출렁 인다. 현대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당 선생은 항구의 목포에서 상당 기간 시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목포는 이난영의 눈물이 아롱지며 예술혼의 도시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노적봉에 볏짚을 덮었다. 조선군의 군량을 많아 보이도록 왜군을 속였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만든 가사다.
유달산을 오르기 전 노적봉이 먼저 눈인사를 한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삼대 노래라면 당연, <목포의 눈물>이 먼저다. 1956년 발표된 손인호의 <비 내리는 호남선>과 1987년 발매된 김수희의 <남행열차>를 들기도 한다. 유달산을 오르면 노래비를 만난다.
1969년 6월 10일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 기록된다. 목포 악기점을 운영하는 박오주 대표가 재원을 마련하여 세웠다. 노래비에는 이난영의 사진과 가사가 새겨졌다. 예전에는 노래비 앞에 서면 <목포의 눈물>을 들을 수 있었다.
목포는 항구다. 기차의 종착지다. 용산에서 화려한 KTX를 타고 광활한 김제 평야를 거치고 목포역에 내리면 철길의 끝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학인은 철길의 끝이 주는 허무감에 한동안 표지판을 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목포의 눈물은 권일송 시인의 시에도 소개된다. 시인은 “열아홉 난영을 끼고 유달산을 오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목포의 눈물>은 해태 타이거즈가 두 번째로 우승을 했던 1986년 광주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기록도 가진다. 증언하는 임채주 원장은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다. 한국 시리즈가 우승을 결정짓는 11번의 경기중 딱 한 번만 홈구장에서 목포의 눈물이 불러 졌다는 전언이다. 학인은 한 번만 불렸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한(恨)의 노래는 한 번의 한을 노래하는 것으로 적당하다는 것도 포함된다.
노래가 나오면서 관중들은 엉엉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의 배경을 모르는 관중은 나중에야 전라도인의 한의 정서가 극대화된 시기에 그 정서가 밑바탕에 맞아떨어진 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울음에는 5.18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정서도 깔려있다.
이난영은 목포의 상징이다. 요즘 <정년이>라는 드라마가 관심이다. 드라마는 목포를 배경으로 한다는 자막이 나온다. 이난영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드라마를 보면 이난영이 떠오르게 한다. 한 줄의 자막이 영감으로 다가서기 때문일 것이다.
이난영은 김시스터즈라는 딸이 있다. 김시스터즈는 미국에 진출 큰 성공을 거둔 뮤지션이다. K팝의 선구자다. 딸들이 성공한 모습을 보려 미국에 갔다. 딸들은 이난영 엄마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했다.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김시스터즈와 한국의 정서라는 한(恨)이 서린 이난영의 노래에 공연은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난영은 딸들의 성공을 보고 한국에 돌아와 6개월 후에 노래의 별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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