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에서 만나는 유명 시인의 사인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05월 21일(화) 16:36 가+가-

‘아름다운 가게’는 헌책도 판매한다. 무상으로 받아 1000원에서 5000원까지, 가격표를 붙인다. 시인들이 내놓은 시집은 시인의 청결미(淸潔美)로 새 옷 같은 책이다. 간혹 시인의 사인(sign)이 들어간 책도 만난다. 엊그제는 조용남의 사인이 담긴 책을 만났다.
오늘은 천양희 시인이 ‘이태극 선생님께 드림’이라 사인이 들어간 시집을 만났다. 명사의 사인만이 아니라 아내가 생일을 맞는 남편에게 주는 책도 있다. 소박한 축하의 글이다.
주로 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 간의 선물 책에 사인이 들어간 책을 종종 만난다. 누군가의 조용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오늘 만난 천양희 시인의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은 제목과 부제 (自己疑視의 시)의 시집이다. 1983년에 평민사가 펴낸 책이다. 무려 40년 전에 펴낸 책이다. 오래된 출판사여서 검색하니 은평구에서 진행형의 출판사다. 천양희 시인은 일면식은 없지만, 선생의 시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이다.
천 시인께서 올린 이태극 시인은 1913년에 출생하여 2003년 분당에 거주하시다 별에 가신 시조 시인이다. 한국의 고유한 시가 형식인 시조에 관심을 가지신 내공 큰 학자다. 시조의 창작은 물론 이론의 정립에도 힘쓰며 시조 장르를 부흥시키신 시단의 큰 학자다. 시도반은 같은 대학에 시조 시인, 이우재 교수와 교분이 큰 이태극 선생의 깊은 시 세계를 종종 들은 바 있다.
천양희 시인도 1942년생이니 팔순을 넘어선 원로 시인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시도반의 ‘호수에 돌을 던지며’ 시가 천양희 시인의 시와 나란히 게재한 독자가 있었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라며 소개한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독자가 감히 천양희 시인과 같이 시도반을 치켜주어 기쁜 시간이 된 일이 있다.
오늘 만난 천 시인의 시집은 1부 1974년~1978년, 2부 1979년, 3부 1980~1983년의 시 모음으로 나누어졌다. 천 선생님의 초기작으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시의 경향이다. 초기의 작품인지 아니면 시인의 의도인지 시에서 잘 쓰지 않는 화자를 들어 나라는 시구가 유난히 많다. 일기를 쓰거나 시를 쓰면서 ‘나’라는 말은 보통 던지고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편이다. 천하에 천양희 시인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나의 어리석음이/ 저 혼자 밖에 나가/ 아이처럼 놀고 있다’ <나의 어리석음이>라는 시다.
선생께서 자의식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보인다. “나의 이미지는 나의 어리석고 바보 같” “나는 약해졌고 울기 잘한다” “나는 무기력하다”의 명제로 그 요약의 구절이다. 선생의 몇 가지 이미지를 보는 것은 시의 이미지, 표현들이 단색 사진을 보는 깊은 여유와 맛이 있다. 최근 시를 공부하는 ‘809詩’ 동인들과의 합평에서도 시의 고정 관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복법을 사용하면 마치 시를 능멸하는 것으로 여기는 시인이 있다. 그것은 처음 시를 배울 때 그렇게 주지된 부분으로 보인다. 청마 유치환의 ‘그리움’ 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에서도 그 같은 경향을 보이는 대표적인 시다.
시에서 나를 비하하고 나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데 힘쓰는 시를 만들다 보면 자기의식의 표현으로 ‘나’를 강조하게 된다.
헌책을 만나는 기쁨을 말하다가 천하의 선배 시인의 시를 이러쿵저러쿵하는 예의를 범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가게에서는 절판이 된 책을 만나는 횡재도 한다. 얼마 전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를 손에 쥐었다. 하루 동안 펼쳐지는 한 여인의 의식 흐름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늘 연민으로 여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손에 넣은 것은 큰 행운이다. 절판된 책이거나 비싼 책을 단돈 3000원에 구매하는 일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복권에 당첨되는 기분이다. 전철역에 가까운 아름다운 가계는 전철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들리는 단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