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여 ‘빵 굽는 타자기’를 읽어라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07월 16일(화) 16:26 가+가-

언론은 왜 ‘그들’을 소환할까?. ‘그들’이라 하는 것은 불필요한 신문, 방송의 패널을 못마땅하게 지칭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늠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화재의 인물들과 건전하지 못한 소통을 주고받는 모리배들이다. 교수인 자도 있다. 부모가 감옥에 있는 자도 있다. 그러함에도 언론에서는 그들을 이름과 얼굴을 내세워 활자를 소모한다. 방송시간에 절망의 언덕을 그려주는 것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면, 우리 사회는 그들과 상반되는 우아의 지식인도 많다. 나는 ‘그들’을 내세는 신문, 방송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 정리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캡틴 선생이 중심이다.
우리 사회에 캡틴과 같은 정종배 시인도 있다. 캡틴 같은 정종배 시인은 교사생활을 하면서 시를 썼다. 정년 후 별이 된 작가를 찾아 조명하고 있다. 학인과는 일면식도 없다. 다만 정시인 이 망우리 공원에 누운 문인들을 소개한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여러 해째 월간‘창조문예’에 연재하는 글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정 시인은 망우리에 잠든 문인의 생애를 조명해주는 솜씨가 일품이다. 일품이라는 표현이 다소 경박하지만 알아듣기 쉽게 마음에 든다는 말이다. 같은 교육자나 작가로 살아가는 품격의 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무릇 척박한 ‘그들’의 무리와 비교가 된다.
<빵 굽는 타자기>를 쓴 폴 오스터 작가가 있다. 사람들은 타자기가 빵을 굽는다는 제목에 호기심을 갖기도 한다. 원래 영문 제목 hand to mouth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생존을 위해 손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간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폴 오스터는 젊은 시절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글을 쓰고 살아남았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폴은 대학을 졸업 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폴은 파리에서 생활, 뉴욕에서 다양한 아르바이트, 그리고 글쓰기의 고통과 좌절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준다. 생계를 위해 번역도 하고, 때로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는 잡역의 일도 해 나간다. 폴은 제아무리 어려워도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잃지 않고 선비적 기질을 가진다.
폴의 <빵 굽는 타자기>는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작가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작가의 생존기를 넘어서,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겼다. 오스터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인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성취는 세계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임이 컸다.
글의 문체는 따뜻하고 솔직한 고백들이 공감을 더 갖게 된다.
동서를 넘어서 작가는 작가가 갖는 진정성으로 시대를 끌어간다.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의 저자 함정임은 떠나간 이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서 여행한다. 흡사 정종배 시인과 결이 같다. 보들레르, 고흐, 카뮈의 묘지를 찾아서 고인의 사람들, 흔적을 살핀다. 함정임 작가는 “삶에도 죽음에도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말 탄 자여 지나가라.”(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묘비명)에 인상적임을 말한다.
사람들은 생을 마친 이후에도 남겨진 이들에 의해 영원히 기억된다. 떠난 이들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육신과 정신이 마지막으로 잠드는 묘지다. 고인의 곁에 남은 사람들은 대개 그가 가장 아꼈던 말 상징물을 묘지에 둔다.
함정임 작가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묘 앞에 도착한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육군 소령과 재혼한 어머니 아래서,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아간다. 그 풍족함 속에서 고독을 느끼며 살아간다.
시인의 특유한 결핍, 보들레르는 팡세의 군중 속의 고독을 실로 경험한다. 생전에 그는 무덤도 묘비도 원치 않았다. 그는 가족묘에 어머니와 함께 묻혀 있었다. 보들레르 시인의 시집은 미당이 평생을 눈앞에 두었다 한다.
망우리 공원묘역에 누우신 작가들도 다르지 않다. 이중섭의 묘를 찾으면 화가의, 첩첩한, 그날을 떠오르게 한다. 시도반은 시인을 좋아한다. 그들은 신선한 생각을 영유하거나 영유하려 노력하는 영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무리에게 시 읽는 시간을 권유한다.
‘빵 굽는 타자기‘를 권한다. 이 땅의 언론에 권유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 술주정하는 ‘그들’을 패널이나 필진으로 사용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