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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이 좋아한 보납산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06월 25일(화) 16:33 가+가-
한석봉이 즐겨 산행한 ‘보납산’은 가평에 있다. 잣의 가평에는 백두 대간의 최고봉인 화악산, 명지산, 축령산, 유명산, 운악산 등 가평 8경에 이름을 올릴 만큼의 산들이다. 그에 비해 ‘보납산’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납산이 유명한 이유는 매년 이곳에서 신년 해맞이 행사가 열릴 만큼 지역민, 군민이 함께하는 산이다. 가평의 농막에 거주하며 집필 중인 김용언 시인(한국현대작가회 회장)은 보납산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높이는 300m지만 전체가 하나의 돌로 되어 가파른 산이다. 한석봉(본명 한호, 韓濩, 1543~1605)이 가평 군수를 지낼 때 유달리 보납산을 즐겨 찾으며 좋아했다. 돌로 이루어진 석봉(石峯)이라서 한석봉이 그 이름을 따 호를 지었을 만큼 아끼는 산으로 알려졌다. 석봉의 또 다른 호로 청사(淸沙)를 쓰기도 했다. 한석봉은 군수를 지내고 2년 뒤 가평을 떠날 때, 보납산에 자신이 쓰던 붓과 벼루를 묻어 두었다. 이후 ‘보물을 묻어 둔’이란 뜻의 ‘보납산’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보납산은 석봉부터 항일독립운동까지 다양한 서사를 가진 산이다. 좋은 정기가 서려 있어 마을의 나쁜 일을 막아 준다는 수호의 의미를 지닌 산이다. 김용언 회장은 보납산이 한눈에 보이는 ‘시골식당 동태탕’ 집을 안내하였다. 주인에 눈앞에 보이는 보납산을 묻자 매우 자랑스럽게 한석봉이 좋아한 산이라 소개해 주었다.
석봉이 좋아한 보납산을 이야기하면서 석봉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야담집인 <동야휘집東野彙輯>(1869년 편찬)에서 꺼내온 말이다. ‘동야휘집’은 역사책에서 빠뜨린 것을 보충하며 그냥 넘기기에 아쉬워 집필했다는 저자의 변이 담긴 책이다.
석봉은 박연폭포 아래서 글씨 공부를 했다.
10년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박연폭포의 바위에 글씨를 썼다. 종이가 흔하지 않던 시절, 돌이 화선지였다. 마침 박연폭포에는 이무기 한 마리가 살았다. 여의주를 얻어 승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봉의 글씨 쓰는 먹물 때문에 승천이 지연됐다. 이무기는 할 수 없이 석봉에게 하루 동안만 먹글씨를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석봉은 거절하자 붓에 조화를 부려 신필이 되게 해준 후 용이 되어 승천했다. 하산한 석봉은 그 붓으로 신필이 되었다.
석봉은 명종 22년(1567년) 식년 진사시에 3등 32위로 입격했다. 천하에 석봉이지만 32위의 진사 입격에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당시 조선 시대의 과거 문과 시험은 정식으로 합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사례로 연암 박지원이 시험장에 갔으나 부정이 난무한 것이다. 지원은 두말없이 과거장을 나오고 말았다는 일화가 그를 증명한다. 석봉이 32등을 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시 양반이 평생 공부를 하고도 진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려웠던 시절이다.
석봉은 합격 후 사자관(寫字官)이라는 공문서를 정리하는 하급(下級)에 머물렀다.
선조가 한석봉의 글씨 솜씨를 아껴 별제(특별)라는 관직을 제수했지만, 대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에 야멸차게 까이고 말았다.
하지만 서예 솜씨만은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 임진왜란 때 중국 관리를 접대하는 데 동원되어 한석봉이 책 하나를 필사해 주었다. 중국 관리는 석봉의 서예를 보고 감탄을 한다. 선조는 그 공로로 왜란 후 재위 33년(1599년) 경기도 가평 군수로 한석봉을 임명하였다. 글 쓰는 것과 지방 행정은 달랐다.
임진왜란 후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을 말아먹은 죄로 탄핵당하여 강원도 통현 감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 같은 예는 그림의 신이라는 김홍도도 그림만 그리다가 연풍 현감을 맡고 대차게 말아먹고 탄핵이 된 적도 있다. 정치와 예술은 전혀 다르다는 교훈이다.
누구에게나 야적(野賊) 기질은 있는 법. 한석봉은 좌천의 쓴맛을 본 후 삐딱 선을 탄다.
임진왜란 공신의 교서와 녹권을 무성의하게 휘갈기다가 1604년에 파직까지 당한다.
나이와 상실감의 충격으로 이듬해 1605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석봉에게는 인생에 가장 알찬 시기는 박연폭포 아래 글씨기 공부였다. 좋은 시절은 산 좋고 물 좋은 가평에서 군수직을 지내던 시절이다. 그러나 전란 이후 어려웠던 그 시절, 정치의 고수인들 행정의 원활한 정책을 꽤 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현대작가회 시인들이 동태탕을 즐기는 동안 보물을 묻어 둔 ‘보납산’의 참나무 소나무들이 여름 햇살에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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