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울림이다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4년 03월 26일(화) 16:43 가+가-

봄은 ‘울림’이다. 울림의 단어는 파생어다. 울림을 모르고 사용하지만,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조선 풍속화가 신윤복이 ‘연소답청 (年少踏靑)’에 절벽과 젊은 여인의 머리에는 분홍진달래를 그려 넣은 장면이 있다. 흥겨운 봄나들이나 봄을 노래할 때 빠질 수 없는 진달래를 여인의 머리에 그려 넣은 것이다. 신 화백은 울림을 여인의 머리에 진달래로 표현했다. 넘치는 센스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은 등을 밀지 않는다” 공지영 작가의 한 줄 문장도 울림이 흐르고 있다. 시는 감정적인 반향으로 쭉 나아가는 것들이다. 다소간 풍요롭게, 그 풍요로움이 자신으로 오든, 시 작품 속에 있든 간에 시에 대한 현상학이 감정적인 반향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상학에서 두 자매어(姉妹語)인 반향과 울림의 차이는 뚜렷해져야 한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 삶의 여러 측면으로 흩어진다. 울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의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 자신 시를 말한다. 그 울림의 시는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어려운 표현보다는 쉽기 쉽게 사례별 울림으로 나아가보는 것이 눈길과 생각을 흩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엊그제 겨울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리(夕陽裏)에 피어 있고/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중(細雨中)에 푸르도다” ‘홍진에 묻힌 분네 생에 어떠한고’로 시작되는 가사 문학의 효시 정극인(1401~1481)의 ‘상춘곡’ 일부다.
복숭아꽃, 살구꽃 만발한 산과 들로 오늘 꽃 구경 가자고 재촉한다. 울림의 표현이 이리도 선연할 수가 없다.
잉크를 선물로 받았다. 봄의 계절에 잉크는 계절이 지나는 것을 아는 것 같다. 하얀 종이에 선을 그으니 종이는 파르르 떨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에게 건네는 것을 종이도 알고 있는 듯싶었다. 울림이란 이렇게 건너거나 건너갈 때 파생되는 것들이다.
‘내리는 봄비를 보다가/ ‘봄비가 오네’ 하고 말했습니다// 혼잣말을 뱉은 게/ 무안하고 어색해서// ‘내가 왜 혼잣말을 하고’ 있지/ 서둘러 말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작게 웃었습니다’
박 준 시의 <봄의 혼잣말>(-처마 아래 풍경처럼) 전문이다.
박 준(1983~) 시는 잔잔하게 다가와 울림을 주고 있다. 봄날은 어디론가 나가고 싶다. 혼잣말도 하고 가슴의 곳곳에는 진달래가 피고 있다. 시인은 봄의 신호가 되는 봄비를 보다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는 혼자서 뱉은 말을 무안해한다. 이러한 시적 구사는 울림의 한 장면이다. 시는 시마다 울림을 가지고 나아간다.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울림도 없고, 울림의 씨앗을 말라버리게 하는 소식들만 나온다, 희망과 기대는 멀어지고 물가 하나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들을 부정하게 만든다. 기웃기웃 볼거리가 없어서 드라마를 본다. 그것도 울림이 없으면 상품을 팔거나 여행을 안내하는 광고를 보기도 한다. 화면을 바꾸다 보니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다.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나온다. 내용이 그리 탐탁하지 않아서 보다 말다, 한다.
어느 장면에 “이제 집으로 가자” 하고 여자 배우가 말한다. 대사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에게 지겨워도 살자고, 새로 살자고, 아니 그냥 지금처럼 살자고’ 하는 분위기의 말이 나온다.
그렇게 멋진 말도 아니고 그렇게 시적 말도 아니지만 묘하게 울림의 파장은 크게 다가온다. 부부 사랑이건, 연애 사랑이건 완벽한 사랑은 없다. 지겨워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을 저렇게도 단순하게 말하는데 울림은 크다. 울림이 크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다. ‘지겨워’ ‘아! 지겨워’ 하는 것도 사랑이다. 역설로 지겨운 것이 없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독실한 신자인 시인과 대화다. ‘봄에는 모두가 기도할 때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기도한다’ 봄에 눈을 감고 기도하기에는 피고 지는 꽃들이 아깝다는 것이다. 강가에서 한번 살아봐야지 생각하는 것이 봄날의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