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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최초로 술을 시에, 담았다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3년 11월 14일(화) 16:30 가+가-
한국사의 천재 글쟁이 시인은 이규보(1168~1241. 고려 시대), 정철(1536~1593, 조선 시대) 황현(1885~1910, 조선의 마지막 선비)을 든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우리 문학사에 최초로 술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국선생전>은 술을 희화한 작품이다. 이규보는 국선생전에서 국선은 국정에 도움을 주는 분별 있는 의인으로 의인화되었다. 주생주사(酒生酒死) 했던 이규보의 술에 대한 애정이 담긴 구절이다. “매양 장실(丈室)에 가면 술을 마시고 주정이나 부렸으며 내전(內典)은 읽지 않았다”라는 문장과 같이 술에 빠져 지낸 이규보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애주가였다.
이규보의 글을 통해 당시의 술 문화를 알게 하는 자료의 역할도 한다. 아마데우스의 영화가 모차르트 시대의 상류 사회 문화를 보여주듯 이규보의 시를 통해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문화를 보여준다. 빼어난 미인들이 춤을 추고 순악(蕣樂)을 연주하며 시를 읊는 고위층의 연회문화를 그리고 있다.
이규보의 어느 시에서는 “나의 몸을 높게 하고 나의 뜻을 활달하게 한다/ 춤도 추고 노래도 하는 것은 다 네가 시킨 것이다”라고 한다. 시에는 주사를 술 탓으로 돌리는 유머를 담고 있다. 이 시인은 술의 소재인 <준명(樽銘)>에서는 차면 비워지는 술병과 술을 마시기만 하는 인간의 배의 대조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경계하는 구절도 있다. 시속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진 청정한 시인의 면모도 보여준다.
이규보의 천재성은 이동식 술자리를 만든 장면이다. 작품 사륜정기(四輪亭記)다.
사륜정기는 오늘날의 포장마차다. 천 년 전에 이규보는 바퀴가 달린 정자에 거문고, 술독이, 술병, 소반 그릇 등의 음주를 위한 도구들이 실려있다. 거기에 바둑판도 들어 있다. 바둑 두는 두 사람을 태우고 돌아다니며 한가로이 술을 즐기려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당시로는 너무나 허무맹랑한 장면으로, 천 년 전에 그러한 일이 실지에 있었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규보 시인의 주체성과 독창성이 두드러진 대목이다.
마치 백남준이 쓸모없는 구식 TV로 작품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백남준의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떤 이는 천지를 창조한 신 다음으로 인류에 놀라움을 준 이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스티브 잡스의 휴대전화를 든다. 여기에 김병기, 신정일, 이덕일 작가는 이규보 시인의 천재성은 사륜정기의 포장마차를 빼놓을 수 없다 한다.
이규보 시인은 2만 여수의 시를 창작하였다. 보관과 인쇄술이 미천한 시절에 8천여 수만이 전해진다.
해는 다리도 날개도 없이/나는 듯 달리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날이 가고 날이 오고 저물면 다시 아침 되어/나의 귀밑털 희게 하고 나의 얼굴 검게 하나/ 나는 동쪽 부상으로 달려가 뜨는 해 구경하고/서쪽 몽사로 가서 해지는 것도 볼 참이네/해 뜰 때 금오를 잡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해질 때도 희화를 술에 잔뜩 취하도록 만들 참이네/이렇게 하면 해도 그만 멈추고서/희화가 술에 깨고 금오가 날개가 나도록 기다리겠지/삼백육십일을 삼천일로 일백 년을 일천 년으로 만들어서/내 두 볼 다시 붉고 귀밑머리 다시 검어지면/ 날마다 좋은 술 취하도록 마시고 싶네/그대에게 묻네 그런데 우리 술 마실 돈이 있던가//
이규보의 술을 노래한 시다. 이규보는 9살부터 술을 즐겼다 한다. 이규보가 살았다는 곳은 인천의 강화군 길상면이다.
고려 시대 빼어난 문장가이자 문신인 이규보가 살았다는 백운곡이다. 그래서 이규보를 백운거사로 불린다. 백운곡은 뻘벌이라고도 부른다. 그 뻘벌 동쪽 나지막한 산기슭에 이규보의 묘소가 있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이도 이규보의 묘소를 보면 명당이 이런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묘소 옆에는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소박한 묘소 앞에는 석등과 망주석 두 개가 있다. 이규보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대몽항쟁으로 인해 당시 고려의 수도가 강화도에 있을 때 이규보는 세상을 떠났다. 이규보는 고려문신으로 황려현에서 호부 사랑을 지낸 윤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규보의 본관은 황려다. 지금의 여주다.
이규보 시인은 음악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천재는 그냥 천재라 하지 않는다.
시, 거문고, 술을 좋아하기에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불렸다.
이규보는 보이는 모습도 달랐던 모양이다. 유모가 규보를 손잡고 문밖으로 나가자 노인이 지나면서 “이 아이는 천금과 같은 귀하 아이인데 어찌 이렇게 버린 것처럼 키우고 있단 말인가? 잘 보호하면 크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들은 유모는 집으로 달려가 이규보의 아버지에게 사실을 전했다. 규보의 아버지는 신(神)인이 아닌가 하고 노인을 찾았으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이규보는 평생 가벼운 병에도 걸리지 않고 살았다. 노인의 말처럼 천금의 명을 타고났던 모양이다.
천재는 처음(태어날 떄)부터 천재다. 고려는 말한다. 오 백 년 고려에 이규보가 없었다면 고려의 왕조 문학은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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