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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최창일 시인·이미지 평론가·<시화무> 저자
작성 : 2023년 07월 18일(화) 16:31 가+가-
“책이 인연을 만든다. 푹 젖는 것이, 귀하다”(정밀한 독서법). 라는 연암 박지원)의 말은 몇 번을 생각하여도 새겨둘 말이다.
역사는 거기에 머문다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도 든다. 연암(1737~1805)이 살던 조선 시대에도 탑골 공원 근처에는 불우한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연암은 양반이며 여유가 있는 부유층에 속한 부류다. 연암은 서민들이 가난하지만, 토론을 즐기는 파고다 공원 근처를 즐겨 찾았다. 30대의 박지원은 장사치, 막벌이꾼, 거지들에게 스승과 같은 명성을 얻기도 한다. 하루는 허름하지만 단정한 차림의 김 벽산 이라는 청년이 연암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과 같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 질문 한다.
연암은 오히려 청년에 묻는다. “자네는 읽은 책 중, 어떤 책이 가슴에 남느냐” 물었다. 청년은 순간적으로 연암이 묻는 말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 간파한다. “저는 읽은 책도 기억에 없습니다. 기억나는 문장도 없습니다.”
연암은 벽산의 답하는 중심이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현명한 젊은이라고 판단하고 제자로, 받아드린다. 조건은 과거에 나가지 않는 것을 전제로 했다. 연암에게 과거는 인맥이 난무하고 부정의 온산이라 판단하고 있다. 연암은 과거를 보러 갔다가 무질서한 퇴행을 보고 돌아섰기 때문이다.
연암의 뜻을 모르는 벽산은 조건만 된다면 과거를 보는 것을 마음에 둔 청년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욕심이 큰 벽산은 스승의 말을 순종하기로 한다. 당장도 아니지 않은가!. 연암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지금에선 최선이라는 판단이다.
연암은 논어(論語)를 4개월에 걸쳐서 보았다는 독서 담을 들려준다. 벽산도 논어를 보았으나 채 한 달이 넘기 전에 보았다.
청년은 연암이 4개월에 걸쳐 보았다는 논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연암이 들려준 말이 생각이 난다. ‘많이 읽고 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하나의 책을 보아도 제대로 음미하고 자세히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이다. 연암의 책을 대함이 천천히 읽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라 일러주었다. 벽산은 연암의 책 읽기의 방법대로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 갔다. 평소의 방법과는 다르기에 청년에게 연암의 글쓰기 첫 단계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시련이 왔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는 일생에 책을 몇 권이나 보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연암의 책 읽기에 이해가 갔다. 글쓴이의 마음과 내용이 차곡히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느리게 읽는다는 것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느림의 방법이 허송의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벽산은 연암과 대화를 하면 천지 만물이 모두 책으로 보였다(관찰하고 통찰의 눈).
“글이 잘 되고 못 되고는 내게 달려있다.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있다.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는 고는 것과 같다.”
벽산은 선생의 말을 선 듯 이해하지 못한다. “귀가 울리는 이명(耳鳴)은 당사자만 알 수 있다. 하지만 코골이는 어떠한가?”“당사자는 모르고 다른 사람만 아는 것이다.”
이명을 가진 자나 코를 고는 이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썼는데 아무도 몰라준다면 그것은 바로 귀가 울리는 자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썼기 때문이다. 자기 글을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비평하는 데도 이해를, 못한다면 그것을 무슨 소리인 줄 모르고 썼기 때문이다.”라는 연암의 말은 쓰고자 하는 뜻을 정확하게 알고 써야만 글쓰기의 기본임을 알려 준 것이다.
연암의 글 읽기와 글쓰기는 같은 뜻이라 말한다. 뜻을 알고 읽을 때 이해를 하는 것이다. 전달이 정확한 글이 잘 쓴 글임을 말한다.
연암은 글을 쓸 때는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각각의 측면에서 그 나름의 온당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에도 제각각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그런 측면들을 빠짐없이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글을 읽는 사람이 편견에 빠지지 않고 의미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하여 준다. 그러면서 글은 새로운 관점을 들출 수 있는 새 관점이 필요함도 말한다. 산술적인 관점이 아니라 제3의 시각을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벽산은 스승의 말을 음미한다. 양쪽의 중간. 이쪽저쪽을 꿰뚫는 사이의 묘를 깨닫지 못하면 글은 헛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벽산은 연암의 탁월한 글쓰기에 감탄하며 연암을 스승으로 둔 것을 최고의 인연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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