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다른 형태의 언어
최창일 시인·이미지 평론가·<시화무> 저자
작성 : 2023년 05월 16일(화) 16:45 가+가-

프랑스인들은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이모’라 부르지 않는다. 종업원의 눈이 마주치기만 기다린다. “이모, 또는 여기에요”라고 부르는 것은 종업원에 차별로 인식한다. 그래서 눈으로 부른다. 때에 따라서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핀란드 사람들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다“라는 농담이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꼭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그 순간을 함께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을 익숙해 한다. 핀란드인에게 침묵은 하나의 언어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상태를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기다림의 공백을 지니고 사는 민족이다. 비단 핀란드인만의 문화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톡방이 있다. 문인들은 그곳에 시를 게재하기도 하고, 소통의 공간으로 유용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ㄱ 작가가 글을 올리면 글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작가는 댓글자에게 감사의 말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감사의 말을 하지 않으면 예의에 벗어난 느낌의, 경우도 있다. 다분히 한국적인 문화다.
우리나라는 프랑스나 핀란드와는 사뭇 다른 문화를 보인다. 타자가 나에게 공감을 보내면 무언가 답례의 표현이 예의다.
그러고 보면 침묵도, 댓글도 하나의 다정한 표현 방법들이다. 문화란 정답이 없는 것이 답이다.
식물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속도로 살아간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는 그가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 바람이 불면 몸과 잎새에 지닌 먼지와 진딧물을 털어낸다. 영양분이 부족한 땅이나 흙이 완벽한 땅이 아닐지라도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추워도 더워도 꼭 맞지 않는 기온의 환경에도 적응한다. 극히 자연 친화적인 태도다. 그들은 댓글이 없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며 목욕을 시켜주어도 미소로 답례하면 끝이다.
그렇게 식물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표현하지 않아도 말의 꽃을 피운다. 항상 여유롭고 풍족해 보인다. 누구와 비교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색하지 않는다,
우리는 침묵도 하나의 표현이며 긍정의 수단이라는 점에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간혹, 필요 이상의 댓글 표현이 화근이 되기도 한다. SNS가 그렇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취중에 감상에 젖기도 한다. 취중의 생각을 단톡방에 올린 것이 화근이 된다. ㅈ 교수는 포도주 한잔을 하고 귀갓길에 교수가 즐겨 하던 SNS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글을 읽은 다른 작가는 “선생님 <로미오와 줄리엣>은 4대 비극이 아니잖아요?”아차 싶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햄릿><오셀로><맥베스><킹리어> 를 4대 비극으로 꼽는다. ㅈ 교수는 4대 비극이 아닌 것을 말하려다가 그만 <로미오와 줄리엣>을 4대 비극으로 말하고 말았다. 모든 것은 포도주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후 교수는 SNS를 극히 자제한다는 말을 했다.
결국, 우리 삶에는 주어지는 경험들이 나만의 세계를 만든다. 그것은 나만의 문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표현이 타자에게 오해를 사기도 한다. 모든 표현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의 침묵이 때론 금이 되는 경우다. 꽃에 묻는다. 말을 하지 않고 꽃을 피우듯 나만의 문화를 가지라고 권하는가 싶다.
물론 소통의 기쁨은 인간이 갖는 행복 중의 하나라는 것에는 주지의 사실이다.
‘편지를 띄우는 자와 받는 자의/ 기쁨은 어느 쪽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받는 자의 기쁨이나 보낸 자의/ 기쁨이 크다는 것을 서로는 알기 때문이다’
시도반의 시 ‘소통의 기쁨’ 전문이다.
이렇듯 소통은 신이 내린 최대치의 감정 수단이다. 그러나 그 사용의 용도가 과한가에 문제가 따른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자연의 순리에 맞기라는 말. 주어진 삶이란 과해도 문제고 덜해도 문제다. 마치 음식을 만들며 간을 많이 해도 맛이 덜하고 간을, 덜하여도 맛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