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박지 위에 새긴 영혼, 골방에서 피어난 시대의 빛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9월 22일(화) 16:02 가+가-

한 평 남짓한 좁고 어두운 골방, 담배 연기가 희뿌옇게 자욱한 그 밀폐된 공간 속에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이중섭이 숨 쉬고 있다. 화가 이중섭이 가장 비참하고 고독했던 시절, 제주도 서귀포와 부산의 좁은 단칸방에서 겪어야 했던 절절한 그리움과 예술적 투쟁은 시인 김정현의 눈을 통해 한 편의 시로 재탄생하고 있다.
‘마당에는/바람이 지우고 간 아이들 발자국/그 위에 그리움이 내려앉아 있다//담배 연기 가득한 골방에는/눈물로 그린 그림 한 점/보랏빛 자란을 닮은 마사코는 웃고//황매화 같은 노란 웃음소리가/허공에 번진다//태현아/태성아/아이들 이름 부를 때마다//무겁게 내려앉는 초가지붕/조금씩 빠져나가는 힘//작은 은박지 위에/눈물에 젖은 그림 한 점/쓸쓸하게 반짝인다’
김정현 시인 <이중섭 골방> 전문이다.
시의 구절처럼, 마당에는 바람이 아이들의 발자국을 지우고 가버렸지만, 그 텅 빈 자리 위에는 여전히 짙은 그리움이 무게를 더하며 내려앉아 있다.
이중섭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풍랑 속에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두 아들 태현, 태성을 일본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단절과 헤어짐이 가져다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었으나, 화가는 자신을 둘러싼 그 고독한 골방 안에서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시 속에서 언급되듯 담배 연기 가득한 골방은 단순한 체념의 공간이 아니라, 눈물로 젖은 그림이 태어나는 숭고한 창작의 산실로 거듭나고 있다.
아내 마사코를 향한 그의 사랑은 묘한 보랏빛 자란을 닮아 있다. 가난과 기아라는 현실적 핍박 속에서도 아내의 웃는 모습을 떠올릴 때, 황매화처럼 노랗고 맑은 웃음소리가 허공에 번져나가고 있다. 그 웃음소리는 슬픔을 잊게 만드는 환각이자, 삶을 이겨내게 하는 유일한 정신적 등불로 작용하고 있다. 화가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태현아, 태성아.” 아이들의 이름을 입안에서 나지막이 뇌일 때마다 초가지붕은 지독한 삶의 무게로 무겁게 내려앉고, 화가의 몸에서는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절망적인 가난은 그의 육체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다.
그러나 화가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던 극심한 궁핍 속에서 그는 담배갑 안쪽의 은박지를 펼쳐 들고 있다. 철필이나 날카로운 뾰족한 도구로 은박지 표면을 긁어내고 그 위에 물감을 문질러 넣는 ‘은지화(銀紙?)’는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이를 “작은 은박지 위에 / 눈물에 젖은 그림 한 점 / 쓸쓸하게 반짝인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반짝임은 단순한 금속의 광택이 아니라, 한 인간이 극한의 절망 속에서 쥐어짜 낸 영혼의 빛이자 절절한 눈물의 결정체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저마다의 형태를 한 ‘골방’을 가슴속에 하나씩 품고 있다. 경제적 불안, 서먹해진 인간관계, 지독한 고독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어두운 벽에 갇혀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중섭의 골방은 우리에게 마침내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지독한 어둠과 가난 속에서도 그는 아이들과 아내를 향한 사랑,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골방은 갇혀있는 감옥이 아니라, 자신만의 예술적 우주를 개척하고 가장 순수한 사랑을 새겨 넣는 은신처였다.
우리는 이중섭이 은박지 위에 새겨 넣은 영혼의 흔적을 보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다시금 돌이켜보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차갑고 가혹할지라도, 가슴속에 간직한 사랑의 기억과 창조적인 열망이 있다면 그 어떤 작은 골방에서도 빛은 피어날 수 있다. 슬픔을 안고 반짝이는 작은 은박지 그림 한 점처럼, 우리 각자의 가슴속 어두운 골방에서도 희망의 빛이 불꽃처럼 피어나기를 조용히 염원하고 있다.
시인이 노래한 이중섭의 그리움은 마침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다.
가을 아침, <이중섭 골방>을 시의 서까래로 노래한 김정현 시인의 시가 쓸쓸한 낙엽으로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