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를 찢고 걸어 나오는 시의 노래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9월 08일(화) 16:15 가+가-

시(詩)적 노래, 한영애의 곡〈누구 없소〉의 도입부를 떠올려 본다.
전주가 흐르고 고요를 깨며 터져 나오는 “여보세요”라는 네 글자는 가창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지독한 고독에 직면한 인간의 실존적 비명에 가깝다.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언어는 사전 속에 갇힌 단어가 아니라 인간의 숨결과 땀방울이 묻어나는 살아 있는 육체이다. 한영애가 노랫말을 ‘뱉는’ 순간, 종이 위에서 잠자던 텍스트는 핏기가 돌고 심장이 뛰는 생명체로 환생한다. 그녀의 발음 하나, 호흡 하나는 그대로 시적 도입부가 되며, 청자는 그 거친 모국어의 살결을 마주하며 전율하게 된다.
시에서 가장 매혹적인 공간은 글자가 적힌 자리가 아니라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바깥에 존재하는 ‘여백’이다. 뛰어난 시인은 빽빽한 문장으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고, 정교하게 배치된 침묵으로 독자를 사어(死語)의 심연으로 이끈다. 한영애의 음악이 지닌 가장 시적인 순간 역시 소리가 멈추고 뜸을 들이는 그 ‘여백’의 순간에 존재한다.
그녀는 소리와 음향 사이의 빈 곳을 가만히 ‘응시한다’. 연극배우로서 무대 위의 공기를 다스렸던 6년간의 경험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는 법이 아니라, 소리를 거두어들였을 때 발생하는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을 가르쳐 주었다. 한영애가 음을 길게 끌다가 뚝 끊어내거나, 악기들의 울림 뒤로 자신의 숨소리를 숨길 때, 무대 위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 침묵의 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청각적 자극이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고도의 시각적 잔상이 피어나는 서정적 공간이다. 소리가 언어의 한계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청자가 그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게 만드는 힘은 오직 한영애만이 부릴 수 있는 음의 마술이다. 시인은 시대의 새벽을 가장 먼저 앓는 존재이자, 무너진 세계의 골짜기를 찾아가 그 부서진 뼈대를 맞추는 치료사이다. 한영애의 음악, 특히 그녀의 영혼을 지탱하는 블루스는 단순한 슬픔의 배설이나 개인적인 한풀이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시선이며, 갈라진 세상을 향한 연대의 손길이다.
그녀의 서사시라 할 수 있는〈조율〉에서 한영애는 분열되고 상처받은 세상을 향해 나직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노래한다. “미움도 수수께끼처럼 풀고” 나누어진 세상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그녀의 목소리는 광장의 거친 구호보다 훨씬 강력한 힘으로 대중의 가슴에 가닿는다. 거대 담론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우리 일상의 언어에서 슬픔과 희망을 길어 올려 음악적 궤적으로 확장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시인의 초상이다.
대중음악 평론가는 그녀를 ‘블루스의 여제’라는 왕관에 가두려 했으나, 한영애는 단 한 번도 안락한 영토에 안주한 적이 없다. 그녀는 과거의 영광을 복제하는 안일함을 거부하고, 언제나 낯선 전위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다’ 포크 그룹 ‘해바라기’의 서정성에서 출발하여 ‘신촌블루스’의 짙은 허스키를 지나, 솔로 가수로 정점을 찍은 이후에도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5집 《난. 다》에서 선보인 트립합과 테크노 사운드로의 파격적인 변신, 그리고 근대가요를 자신만의 서사로 재해석한 《Behind Time》의 실험은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지나간 풍류는 이미 지났네, 저 멀리 앞을 봐”라고 외치는〈코뿔소〉의 노랫말처럼, 그녀는 언제나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공간을 살아간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어제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부표를 찾아 떠나야 하는 시인의 운명처럼, 한영애는 스스로 쌓아 올린 장르의 벽을 제 손으로 부수며 전진한다. 계산되지 않은 듯한 날것의 올림과 정교한 예술적 통제가 공존하는 그녀의 음악적 여정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의 신화이다.
한영애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음의 높낮이를 즐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영혼의 서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며, 잊고 지내던 모국어의 은밀한 살결을 만지는 촉각적인 경험이다. 그녀는 음표의 장막 뒤에 숨지 않고, 노래라는 형식을 빌려 삶의 비극과 황홀경을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번역해 낸다. 명사로 굳어진 세상의 규범들을 비웃듯 거침없는 동사의 리듬으로 무대를 가르는 음악가 한영애. 그녀의 목소리가 존재하는 한, 한국 대중음악은 가장 뜨겁고 치열한 ‘시적 순간’을 매번 갱신하게 된다. 그녀는 대중음악이라는 드넓은 영토 위에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