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함께 한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문민용 논설위원
작성 : 2026년 08월 19일(수) 16:20 가+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하자.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른다. “싫어요. 난 여기가 좋아요. 먹을 것도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받지요. 보호받지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나가는 건 싫어요.” 그러나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러운 두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스러운 엄마의 품에 안기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참 좋구나. 세상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의 그곳보다 더 좋아. 이곳 생활이 옛날 생활보다 훨씬 좋아.”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 시절이 흘러가고 아이는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며 성인이 됩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노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난 여기가 좋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라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라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 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왕이 어떤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 즉시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 역시 사랑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악한 짓을 하여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기 때문에 혼자서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세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먼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으나 그 친구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서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암, 함께 가 주지.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자네는 몹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 드려 주지”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친구란 재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가야 합니다.
두 번째 친구란 친척입니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 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그 사람이 죽은 뒤에 그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만났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왕의 질문에 솔론은 대답했습니다.
“아테네의 델로스입니다. 그는 자녀를 잘 길렀고 행복한 가정을 꾸몄으며 나라를 위해 전사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누구인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사람들입니다.”
“솔론, 왜 자네는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지목하지 않는가?”
“전하, 인생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비석이 서기 전까지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