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욥의 노래》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6월 30일(화) 16:23 가+가-
젊은 시인이여. 우리는 지금 말이 가벼워진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장들이 타임라인을 채운다. 감각적인 수사들이 순식간에 소비되었다가 지워지는 광경을 매일 목격한다.
언어가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시인은 자주 언어의 무력감을 느낀다. 타인의 지독한 슬픔이나 시대가 앓고 있는 거대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공들여 벼려온 시어들은 얼마나 자주 무력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곤 하던가.
만약 당신이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밤을 지새우고 있다면,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의 근원적인 무서움을 외면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면, 나는 당신의 책상 위에 한 권의 시집을 올려두고 싶다. 고대 히브리 시문학의 정수, 《욥의 노래》이다.
우리는 흔히 ‘욥기’를 종교적인 인내와 보상의 서사로 기억한다. 모든 소유와 자식을 잃고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더니 마침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좋은 결말의 종교화로 말이다. 그러나 그 익숙한 액자를 걷어내고 히브리어 운문 원전의 거친 숨결을 그대로 살려낸 이 시집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안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신앙의 간증록이 아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비극 서사시’이며,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고통의 심연에서 터져 나온 부서진 언어들의 기록이다.
《욥의 노래》 중반부를 가득 채우는 것은 욥과 그의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설전이다. 이 논쟁의 구도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단, 그리고 시인들이 겪는 언어적 갈등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친구가 고통받는 자리에 찾아온 이들은 언뜻 가장 종교적이고 정당하며 위로가 가득한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오늘날 상업적 축복의 문구로 오용되는 그 유명한 구절 역시 실은 욥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죄를 지었으니 이 모양이 아니냐, 지금이라도 회개하라”라며 고통의 원인을 욥에게 전가하는 친구 빌닷의 잔인한 훈계였다. 친구들의 언어는 매끄럽고, 정돈되어 있으며, 당대의 상식과 신학적 시스템 안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산문의 언어’이다. 그들은 기성 체제의 논리로 욥의 고통을 깨끗하게 설명해 버림으로써, 고통의 신비와 대면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고통의 당사자인 욥은 그 매끄러운 위로와 훈계의 수사학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너희는 모두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구나. 허망한 말에 끝이 있겠느냐?”
욥의 이 반박은 시스템의 언어, 설명하는 언어, 기성의 논리에 갇힌 산문적 세계를 향해 던지는 시인의 일갈과 같다. 욥은 친구들이 권하는 안이한 화해와 타협을 거부한 채,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며 신을 향해 고발장을 던진다. “어찌하여 나를 과녁으로 삼으셨나이까?”라고 묻는 그의 처절한 절규는, 신성 모독에 가까운 도발이자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저항이다.
??이 비극의 정점은 욥이 마침내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신이 ‘폭풍우 속에서’ 대답하는 후반부에 있다. 그런데 신의 대답은 기이하다. 신은 욥에게 “네가 왜 고통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대신 폭풍 속에서 거대한 질문들의 세례를 퍼부을 뿐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누가 바다를 문들로 막아 두었느냐?”, “네가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신은 인간 중심적인 좁은 시야에 갇혀 있던 욥을 이 우주의 광활한 신비 앞으로 끌고 나간다. 리바야단과 베헤못 같은 신화적 야수들의 기괴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인간의 쓸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광야에 내리는 비를 보게 한다. 여기서 욥은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고통이 우주적 질서 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이다.
젊은 시인이여. 시인은 어쩌면 폭풍 속에서 들려오는 이 무서운 질문들을 받아 적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대해 즉자적인 답변을 내놓는 정치적 산문가가 아니라, 그 고통의 깊이를 온전히 재기 위해 우주적 신비와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는 눈, 그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욥기 시집의 장점 중 하나는 영국의 예언자적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욥기 연작 판화가 함께 흐른다는 점이다. 블레이크가 새겨 넣은 선들은 고통으로 뒤틀린 욥의 육체와 그 위를 압도하는 신령한 불꽃들을 시각화한다. 블레이크의 삽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의 비극은 그 자체로 신성한 예술의 캔버스가 될 수 있다고.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한 자만이 그 뒤틀린 선 속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언어의 파산 상태에서 오히려 가장 위대한 시가 태어난다는 역설을 믿는다면, 이 고대의 욥이 던진 무서운 리듬을 당신의 필사 지에 꼭 한 번 받아 적어 보기를 권한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당신만의 눈부신 눈[眼]이 열릴 것이다.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시군별뉴스

오피니언

기사 목록

대한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