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편협의 인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6월 09일(화) 16:22 가+가-
편협함을 벗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여러 입장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습관 자체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을 개방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특정 시선에 익숙해진 채 그것을 ‘전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편협함이 무지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지식과 태도를 갖춘 사람들에게서 더욱 교묘하게 나타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한쪽만 본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정부를 비판하면, 우리는 그 비판의 논리적 타당성보다도 그 ‘낯섦’에 먼저 반응한다. 마치 천둥소리를 듣는 것처럼 놀라며, 그 강렬한 음색에 신선함을 느낀다. 이때 우리는 비판의 내용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흔드는 ‘소리’ 자체에 매혹된다. 이런 태도는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수동성에 가깝다. 즉 우리는 비판을 소비할 뿐, 판단하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자신이 반대하는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 의견을 반박할 자격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자는 차원을 넘어,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관점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 입장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사고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검증되지 않은 확신은 언제든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인간이 ‘관점적 존재’임을 강조하며,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해석들의 긴장을 통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체의 관점 주의를 오해하면, 모든 입장이 동등하다는 상대주의로 흘러가기 쉽다. 중요한 것은 관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관점들 사이의 충돌을 견디는 능력이다. 편협함은 관점의 부족이 아니라, 관점 간의 긴장을 회피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내가 아는 편협의 논리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착각도 한다. 현대는 각각의 휴대전화에서 각각의 뉴스를 점한다. 조용한 방에서 혼자서 듣는 소식을 혼자만의 소통으로 착각한다. 어쩌면 편협을 만드는 것은 도구가 되고 그 도구가 주는 소식을 편협으로 만들어 버린다. 많은 소식을 접하고 판단의 능력을 길러가는 연습이 부족한 것이다. 거대 방송사가 만든 뉴스가 다 옳다는 시대는 지나갔다. 한국의 대형 방송사는 2 만여 명 가까운 종사자가 바쁘게 뉴스와 교양 프로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 뉴스를 믿는다. 사실은 그 뉴스 속에 편협으로 구성하고 뉴스를 편협으로 만들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같은 부정의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범죄의 크기가 달라진다.
방송사의 앵커가 큰 액수의 가방을 마치 화장품을 담는 파우치 가방으로 비유하면 시청자는 그렇게 믿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사유의 무능력’을 편협함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녀가 말한 사유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 검토하는 내적 대화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의도하지 않고도 저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즉 편협함은 도덕적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지 못할 때, 비로소 가장 좁은 세계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논의는 하나의 공통된 지점을 가리킨다. 편협함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판단의 게으름이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비교하고’, ‘의심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은 생략한 채, 자신에게 더 자극적이거나 익숙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우리는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따라서 편협하게 살지 않은 데 필요한 것은 균형 잡힌 태도가 아니라, 불편함을 견디는 용기다. 나와 다른 의견을 접했을 때 즉각적으로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그 논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탐색해야 한다. 또한, 비판을 들을 때 그 강도나 표현에 매혹되기보다, 그 근거와 맥락을 검토해야 한다. 이는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사유란 본래 그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편협하다.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편협함이 신념으로 굳어진다는 점이다. 편협함을 벗어난다는 것은 완전한 객관성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시선을 의심하는 과정에 자신을 노출하는 일이다. 그 불안정한 상태를 견디는 사람만이, 비로소 한쪽이 아닌 ‘사이’를 볼 수 있다.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시군별뉴스

오피니언

기사 목록

대한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