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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초강대국은 없다… 한국, 새로운 비전의 국가로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4월 21일(화) 16:56 가+가-
냉전이 끝난 뒤 세계는 잠시 단극(單極)의 시대를 꿈꾸었다. 미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별이 모든 위성국을 거느리며 국제질서를 설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21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세계는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한 나라도 ‘초강대국’이라는 이름을 독점할 수 없는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미국은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유럽의 자율적 방위 의지, 그리고 트럼프식 고립주의의 반복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신화가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좀 더 신랄하게 말하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들어 ‘약탈적 패권주의’로 전락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력으로 세계를 조이려 하지만, 내부의 인구 절벽과 기술 봉쇄라는 벽 앞에서 속도를 잃어가고 있다. 러시아는 유라시아의 교란자로 남아 있되, 전쟁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 패권의 공백은 곧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이다. 역사는 언제나 공백을 채우는 자의 것이었다.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들이 있다. 인도, 브라질,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한국. 이들은 더 강대국의 그늘에 줄을 서지 않는다. 각자의 문법으로, 각자의 속도로 새로운 세계를 쓰고 있다. 한국은 그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궤적을 그리고 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빈곤을 통과한 나라가 반도체와 K-문화, 조선과 바이오라는 네 개의 날개를 달고 세계 무대에서 날고 있다.
2025년 현재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세계 12위권이며, 문화 수출의 영향력은 경제지표를 훨씬 넘어선다. BTS가 빌보드를 점령하고, 봉준호가 오스카를 받고,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품에 안은 것은 개인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새로운 종류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물어야 한다. 한국은 지금의 성취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비전 없는 성장은 방향 없는 질주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단순히 더 많이 수출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목표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결국 20세기형 산업 국가의 복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비전의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력과 군사력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가 공동체와 연결되며, 공동체의 가치가 세계와 공명하는 나라다. 한국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그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한글이라는 가장 민주적인 문자, 두레와 품앗이라는 상호부조의 정신,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망, 그리고 압축 근대화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인문학적 감수성. 이것들이 21세기 한국의 자산이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한국은 ‘강한 나라’가 아니라 ‘품위 있는 나라’다.
노인이 존중받고 청년이 희망을 품으며 여성이 온전한 주체로 서는 나라. 예술가가 굶지 않아도 되고 과학자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으며 농부가 땅에서 긍지를 찾는 나라. 군사력 대신 외교력으로, 통제 대신 신뢰로, 배제 대신 포용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나라. 그것이 초강대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길이다.
분단이라는 현실은 여전히 무겁다. 그러나 분단을 위기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통일을 통한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볼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 나아가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인류의 염원과 연결된 문제다. 한국이 이 무게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단순한 중견국(middle power)을 넘어 ‘도덕적 강국’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초강대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 황혼 속에서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그 별 중 가장 독특한 이야기를 가진 나라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이어갈 용기와 상상력이다. 비전을 가진 국가만이 역사를 쓴다. 한국의 다음 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 빈 페이지 앞에서 우리는 함께 묻고 함께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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