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를 위한 569년 만의 통곡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3월 10일(화) 16:14 가+가-

영화관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작은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파도처럼 번졌다. 조명도 밝혀지지 않은 어두운 상영관 안, 화면 속 왕과 백성의 눈빛이 교차하는 순간 여성 관객 한 명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내달렸다. 문밖 복도까지 들려오는 대성통곡. ‘왕과 사는 남자’는 이렇게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이 작품은 단순한 사극이 아니다. 역사적 비극 속에 녹아든 인간의 순수한 유대가 극장을 오열의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의 비운의 왕 단종(1441~1457, 박지훈 분)과 그를 지킨 용맹한 장수 엄홍도(1404~1474, 유해진 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단종의 나이 오늘의 시간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영화는 단종의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왕과 백성 사이에 싹트는 뜨거운 우정을 그린다. 역사서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단종의 최후를 영화는 감동적 드라마로 재해석했다. 엄흥도는 실제 역사에서 관아의 용맹한 장수(국장급 관리)였다. 영화에서는 촌장 같은 평범한 백성으로 등장한다. 이 설정이야말로 작품의 천재성이다. 왕의 고귀함과 백성의 투박함이 대비되며, 정치적 냉혹함 너머 인간적 따뜻함이 돋보인다. 영화의 감정선은 서서히 쌓이다 클라이맥스에서 폭발한다. 특히 관객을 대성통곡하게 만드는 장면은 대사 없는 눈빛 교환이다. 유배지에서 단종과 엄홍도가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 말은 필요 없다. 박지훈의 눈동자에는 왕으로서의 슬픔과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유해진의 깊은 눈빛에는 백성으로서의 충성과 다가올 이별의 아픔이 서려 있다. 이 장면은 배우들의 케미스트리가 절정에 달한 부분으로, 여성 관객들이 특히 강하게 반응했다.
한 관객은 “엄마 마음으로 울었다”라며, 단종의 병약한 모습과 엄흥도의 든든한 보호 본능이 모성애를 자극했다고 전했다. 상영관을 나선 뒤 화장실에서 터뜨리는 통곡은 이 눈빛이 불러일으킨 공감의 여파였다. 또 다른 오열 포인트는 단종의 마지막 부탁 장면이다. “때가 되면 네 손으로 날 죽여줘”라는 말과 함께 활줄을 건네는 순간, 극장은 숨소리조차 멎는다. 역사적으로 단종은 청으로 압송되어 자살했으나, 영화는 탈출과 비극적 마무리로 각색해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 허구적 재구성이 오히려 진실을 더 생생히 전달한다. 정치 권모술수가 난무한 조선 후기,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애쓰는 백성의 헌신이 가슴을 찌른다. 전미도 (매화 역)의 슬픈 눈빛은 이 비극을 보조하며 깊이를 더한다. 그녀의, 무언의 연기는 유배지의 따뜻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슬픔을 증폭시킨다. 촬영 이면도 이 감동의 원천이다. 박지훈은 병약한 왕을 위해 15kg을 감량했고, 영하 15도 영월에서 흘린 눈물이 실제로 얼어붙어 NG가 날 정도였다. 강가 끝 장면은 유해진의 아이디어로 추가됐는데, 단종이 물장난을 치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원작에 없던 창작이지만 가장 애틋한 순간이다. 다슬기 먹기나 노랑나비 장면 같은 애드리브는 우연 속 현실감을 더했다.
이러한 현장 헌신이 화면 속 생생함으로 이어졌다.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 영화의 전형을 깨는 작품이다. 화려한 전투나 궁궐 음모 대신, 유배지의 소박한 일상이 주인공이다. 음악과 미술은 절제된 채 감정을 뒷받침하고, 연출은 여백을 준다. 결과적으로 천만 돌파는 당연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힘은 관객의 통곡에 있다. 여성 관객들이 화장실까지 달려가 오열하는 이유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왕과 백성의 우정이 현대 사회의 소외된 인간관계에 던지는 메시지 때문이다. 권력에 짓눌린 약자가 서로를 지키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물론 역사적 정확성을 따지자면 아쉬운 점도 있다. 엄흥도의 신분 격하와 단종 최후의 각색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인물의 감정을 우선했다”라며 영화적 자유를 행사했다. 이는 사극의 본질이다. 역사서의 찬반논쟁을 넘어 인간 드라마로 승화시킨 점에서 성공적이다.
영화는 끝나도 여운은 남는다. 상영관을 빠져나온 관객들의 붉어진 눈가는 그 증거다. ‘왕과 사는 남자’는 2026년 한국 영화계를 풍미한 걸작으로 기억될 터. 극장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경험, 역사의 뒤안길 통곡일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을 둔 엄마라면 단종의 사망은 통곡이 되고도 남는다. 단종 서거 1457년 10월 21일, 569년이 지났다. 그날의 단종과 엄흥도를 위한 통곡은 ‘패자의 역사’를 객관화시키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