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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의 그림자를 그리다 떠난 사람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2월 24일(화) 16:18 가+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역사의 어두운 골짜기를 비추는 등불이자, 정의의 왜곡이 어떻게 무고한 생명을 짓누르는지 묻는 호소다.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 정치적 오해 속에 갇힌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리고 냉전의 희생양 이수근. 이들의 사연은 시대를 초월해 억울함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 공통점은 권력의 편의와 증거의 조작이다. 오늘, 시도반은 그 억울한 그림자들을 따라가며 정의의 회복을 조금이나마 벗겨본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사 최전선의 억울함이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무죄를 선포 받았음에도 군중의 광기와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 속에 못 박혔다.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오히려 반역의 누명으로 뒤집혔다. 그는 치유자이자 사랑의 전파자였으나, 정치적·종교적 이해관계에 희생됐다. 성경은 그 장면을 생생히 기록한다. 채찍질, 가시관, 십자가 무게, 고통의 절정에서조차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 억울함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무고한 창조주가 피조물에 배반당한 비극. 현대 사회에서도 예수의 이야기는 권력 남용의 경고등이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자들의 아픔을 상기시키며, 시대가 바뀌어도 억울함의 패턴은 반복된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의 대가’라는 오명을 영원히 썼다. 그의 저서 《군주론》은 이상적 통치를 위한 냉정한 현실론이었으나, 후대 독자들에 의해 악마의 성경으로 왜곡됐다. 실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을 위해 프랑스·스페인 사이에서 외교를 펼쳤고, 메디치 가문의 탄압 속에 고문과 투옥을 견뎠다. 1527년 죽을 때까지 그는 “나는 공화주의자였다”라고 외쳤으나, 누명은 수 세기 지속했다.
비평가들은 그를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으로 몰아,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그를 실용적 현실주의자로 재평가한다.
억울함의 뿌리는 오독이다. 권력의 언어가 어떻게 무고한 사상을 왜곡하는지, 마키아벨리는 살아 있는 증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수근의 비극은 충격적이다. 1967년 2월 14일, 판문점에서 총격을 무릅쓰고 월남한 그는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다. 서울 입성 때 10만 군중이 환호했다. ‘꼬꼬무’(공산권 꼭두각시 무찌르자 운동)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러나 불과 2년 후, 가족 구출을 위한 제3국 망명 시도 중 체포됐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이중간첩’으로 몰아 54일 만에 사형 집행했다. 고문의 실태는 끔찍했다. 전기 충격, 물고문, 몽둥이 폭행. 불법 구금 상태에서 허위 자백을 뽑아냈다. 유일 증거는 그 자백서뿐이었다.
이수근의 억울함은 단순한 개인 비극이 아니다. 1960년대 냉전 한국의 반공 광풍 속에서 권위주의 정권은 귀순 영웅조차 희생양으로 삼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고문은 국가보안법의 어두운 면이다.
2007년 진상규명위원회는 “중정의 조작”으로 결론지었고, 2018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됐다.
법원은 “고문 속 자백은 증거능력 없음”이라 판결하며 국가의 잘못을 인정했다. 유족은 22억 원 배상을 받았으나, 이수근의 묘비조차 세울 수 없었다. 2026년 지금도 TV 다큐멘터리에서 재조명되는 이유다. 그의 사연은 국가 폭력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아픈 지점이다.
권력의 왜곡, 증거 조작, 시대적 광풍. 예수의 십자가는 영적 구원의 서사로 승화됐으나, 마키아벨리와 이수근은 세속적 한계를 드러낸다. 마키아벨리는 지식으로, 이수근은 법적 재심으로 겨우 누명을 벗었다. 억울함은 왜 반복될까? 철학자 니체는 ‘노예 도덕’에서 약자의 원한이 강자를 무너뜨린다고 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의 강에서 “싸움 없인 화합 없다”라고 했다. 권력은 늘 약자를 짓밟으며 안정을 추구하지만,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한국의 경우, 이수근 사건은 과거사 청산의 상징이다. 그러나 2026년 지금, 정치적 공세와 가짜뉴스 시대에 비슷한 누명이 재현될 위험이 있다. 문학적으로 이 사연들은 시적 영감을 준다. 예수의 고통은 톨로레스(고통의 시) 전통을 낳았고, 마키아벨리는 비극적 모놀로그를, 이수근은 현대 발라드를 연상시킨다. 시도반으로서 이렇게 읊조린다. “십자가의 못은 녹슬었으나 / 남영동의 전선은 여전하다 / 억울함은 강물처럼 흐르며 / 정의의 바다로 흘러간다.” 억울함을 넘어서는 길은 ‘진실’ 규명이다. 예수의 부활처럼, 마키아벨리의 재발견처럼, 이수근의 무죄처럼. 사회는 과거를 직시하며 미래를 다짐해야 한다.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경종이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를 외면 말고, 손 내밀자. 정의는 침묵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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