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 조병무님이 나갔습니다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6년 01월 20일(화) 16:21 가+가-

한국현대시인협회의 단톡방이다. ‘평리 조병무님이 나갔습니다’. 한 줄이 떠오른다. 현대 시인협회의 평의원이신 조병무(1937~2026) 선생께서 한 주전에 별에 가셨다(1월 11일). 모르긴 해도 가족 중의 한 분이 선생님의 단톡방을 정리하신 것으로 보인다. 평의원 여러 선생이 별에 떠나셨지만 이렇게 단톡방을 정리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소설묘사 사전>을 펴내기도 한 조병무 시인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낮은 언어로 세계를 견디는 일’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선생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려한 의미의 폭죽,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평리(平里)가 독자의 손을 잡는다. 독자는 의미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자리, 말이 최소한으로만 허락되는 자리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세계가 얼마나 시끄럽고, 동시에 얼마나 쉽게 폭력적으로 말해져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조병무의 <마음>과 같은 시편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그의 시에는 극적인 서사가 거의 없다. 대신 어떤 장면이 가만히 놓여 있을 뿐이다.
골목의 오후, 오래된 사물, 사람의 뒷모습,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의 잔향 같은 것들. 그러나 이 평범한 장면들은 결코 평면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낮은 음성으로 드러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조병무 시의 대표적 특징은 무엇보다 침묵의 미학이다. 그의 시편들에서 언어는 설명하지 않는다. 판단하지도 않는다. 다만 놓아둔다.
독자는 종종 “이 시가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붙잡으려다 실패한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시는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무슨 색깔이 나올까> 시에서도 화자는 어떤 장면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문장은 짧고, 행은 종종 끊긴다. 시의 건축은, 거기서 멈춘다. 그러나 그 멈춤은 무책임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다. 말이 더 나아갈수록 세계를 단정하게 되고, 단정은 곧 폭력이 되기 쉽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보호한다. 이 침묵은 현대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해함과 다르다. 조병무의 시는 독자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를 천천히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다만 그 안쪽에서는 어떤 즉각적인 쾌감도, 분명한 결론도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자기 삶의 기억과 상처, 질문을 꺼내어 그 침묵 속에 놓게 된다.
조병무의 시편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은 낮은 시선이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는다. 관찰자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의 시적 화자는 언제나 세계와 같은 높이, 혹은 그보다 더 낮은 곳에 있다. 어떤 시에서 화자는 사소한 사물 하나를 오래 바라본다. 그것은 특별한 상징으로 확장되지도 않는다. 다만 거기 있다는 사실, 오래 버텨왔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이때 시는 사물을 해석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조병무에게 시란 의미를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 일에 가깝다.
이 낮은 시선은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같다. 그의 시에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결코, 전형화되지 않는다. 영웅도, 피해자도, 교훈의 주인공도 아니다. 다만 살아온 흔적을 몸에 지닌 존재로서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시는 그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곁에 머문다. 시의 건축들에는 종종 상처의 흔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상처 그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아픔을 소비하지 않는다. 울부짖지 않는다. 감정을 증폭시키지도 않는다. 시가 포착하는 것은 늘 ‘이후’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 말이 멎은 뒤의 공기, 관계가 무너진 다음의 정적. 이러한 장면들은 독자가 더 깊은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이미 상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병무는 그 사실을 신뢰한다. 그래서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오늘날 감정의 과잉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표현되고, 상처마저 콘텐츠로 소비되는 시대에, 조병무의 시는 아픔을 조용히 존중하는 법을 보여준다. 이는 미학이기 이전에 윤리다. 시편들에서 시간은, 늘 느리다. 급하게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어떤 의미가 생겨날 때까지, 혹은 아무 의미도 생겨나지 않는 상태를 그대로 두기까지 기다린다. 이 시간 감각은 그의 시를 쉽게 소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오래 남게 만든다. 한 번 읽고 끝나는 시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다시 돌아오게 되는 시. 독자의 삶이 변하면서 시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는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 영원 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라짐을 끝까지 지켜본다. 그 인내 속에서 시는 존재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조병무의 시는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시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는 묘하게도 시대를 견디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침묵의 힘이며, 낮음의 힘이고, 서두르지 않음의 힘이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오히려 드문 시적 윤리다. 그 지점에서, 조병무의 시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