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평화의 의미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12월 23일(화) 16:32 가+가-

성탄이 다시 찾아왔다. 매년 이 시기가 오면 우리는 자연스레 축제의 밝은 색채와 들뜬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올해만큼은 마음 한편이 무겁다. 예수가 탄생한 그 땅에서 지금 들려오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포성이다. 두려움과 분노, 상실과 증오가 뒤섞인 그 참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날, 우리는 무엇을 축하하고 있으며,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예수의 삶이 가르치는 핵심은 ‘대속(代贖)’이 아니라 ‘순결한 정신’이었다. 그는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복이 아니라 용서로, 적대가 아니라 연대로 인간의 가능성을 증언했다. 그러고서야 ‘대신 속죄’도 가능하다. 오늘의 세계에서 그 정신은 얼마나 힘을 지니고 있는가. 포성이 울리는 중동의 한복판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담을 쌓고, 언어의 폭력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거칠어지고,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 시대에 성탄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기념이 아니라 성찰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말하면서도, 그 의미를 실천하는 데는 놀랍도록 인색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려는 용기,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겸허함이 함께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가치다. 예수는 그 평화를 위해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내려놓았고, 우리는 그 정신을 오랜 세월 신앙과 문화 속에서 기려 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평화는 얼마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성탄이 되면 많은 이들이 선물을 준비하고 화려한 조명을 밝힌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조명 아래 가려진 어둠을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멀리 전쟁 지역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이들,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이들, 구조적 폭력 속에 놓인 이들이 존재한다. 평화는 세계정세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얼마나 듣고 있는가. 우리의 말이 누군가에게 칼날이 된 적은 없었는가. 우리의 침묵이 누군가의 고통을 더 깊게 만든 적은 없었는가.
성탄의 정신을 오늘에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책임 있는 인간’으로 서야 한다. 예수가 보여 준 순결함은 현실을 외면하는 청렴함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는 용기였다. 그는 불완전한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먹고 웃었으며, 사회의 주변부에서 밀려난 이들과 어깨를 맞댔다. 이 정신은 시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열고, 서로의 상처 앞에서 한 걸음 멈추는 태도를 통해 이 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 포성은 멀리 있어 보이지만 사실 우리 안에서도 울린다. 분노의 언어, 경쟁의 강박,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잣대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폭력은 우리 각자를 소진 시키고 있다.
성탄이 주는 의미는 그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기 위한 작은 신호다. 잠시 멈추어 서서, 무엇이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를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 성찰이 없다면 성탄은 단순한 연례행사일 뿐이며, 예수가 보여 준 의미는 해마다 반복되는 의식 속에서 점점 퇴색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탄을 축하하는 대신, 성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단순한 명령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가장 강력한 도전이었다. 전쟁을 멈추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마음의 전쟁을 멈추는 일 또한 그에 못지않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오해를 풀기 위해 시간을 들이며, 공동체의 상처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작은 행동들이 평화의 시작이다.
성탄은 결국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다. 예수의 탄생이 그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되었듯, 오늘의 성탄도 우리가 마음에 밝히는 작은 변화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가 먼저 빛을 밝힌다면, 포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세상도 변화의 가능성을 품게 될 것이다. 성탄의 정신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깊숙한 곳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진짜 힘을 갖는다.
다시 성탄을 맞아, 우리는 다시 묻는다. “나는 평화를 향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전쟁의 소리로 얼룩진 이 시대에 작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의 순결한 정신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며, 성탄은 축제가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