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배우를 위한 아서 밀러의 대변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12월 16일(화) 16:16 가+가-

살다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도덕적 파산자’로 몰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사건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누군가의 과거’가 전면에 소환되고, 해명과 회복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문화가 하나의 풍경처럼 자리 잡았다. 이런 시대에 아서 밀러의 시련(The Crucible)은 새삼스럽게도 불편한 거울을 들이대며 ‘너와 네게’ 묻는다. “죄는 언제 끝나는가? 그리고 죄의 끝을 결정하는 이는 누구인가?” 밀러의 희곡이 다루는 1692년의 세일럼 마녀재판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는 이 비극을 통해 한 사회가 집단적 공포 앞에서 어떻게 이성을 잃어가는지, 그리고 ‘도덕적 확신’을 가장한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존재를 파괴하는지 절묘하게 드러낸다. 작품 속 배경은 종교적 열광과 도덕적 경직성이 지배하는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오해가 곧장 영원한 낙인으로 확정되는 사회. 의심이 증거를 대신하고, 침묵이 곧 죄의 고백이 되는 세계. 바로 오늘의 현실이 투사된 풍경이다.
작품의 중심인물 존 프록터는 과거의 한 순간적 잘못. 아비게일과 불륜으로 인해 삶 전체가 흔들린다. 그는 이미 회개의 길을 걸었고, 그 죄를 자기 내면에서 반복적으로 직면해 왔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내적 변화에 관심이 없다. 죄의 ‘사실’만을 원하며, 회복의 가능성에는 무관심하다. 프록터가 궁극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재판장이 아니라, 인간을 더는 변화 가능한 존재로 보기 싫어하는 대중의 단호한 시선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군중 심리를 들여다본다. 밀러가 참혹할 만큼 정확하게 포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종종 ‘사실’보다 ‘정서’를 더 빠르게 준용한다.
이 정서는 공포와 결탁하면 무한한 확증편향의 엔진이 된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의 변화와 성숙을 믿어 주는 데는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깊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를 잃어버릴 때, 우리는 스스로 정의롭다 착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잔혹한 마녀사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시련에서 마녀재판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마녀’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 확신은 현실의 상처를 해결하기보다는 어떤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아 불안을 잠재우고자 하는 심리에서 자란다. 프록터가 마지막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는 이유도 바로 그 거짓된 질서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자신의 이름, 곧 존재와 진실을 사수하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개인적 비극을 넘어, 집단적 광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끝까지 몸부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희곡을 읽으며 새삼 떠오르는 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인터넷이라는 광장은 세일럼의 마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넓게 불을 번지게 한다. 누군가의 과거는 클릭 몇 번이면 현재의 죄로 재해석되고, 해명할 여지는 댓글의 속도에 뒤처진다. 이미 형벌을 마친 잘못마저 새로운 단죄의 근거로 소환되기도 한다. ‘변화한 인간’보다 ‘낙인찍을 수 있는 인간’을 더 쉽고 안전하게 소비하는 문화가 익숙해진 탓이다.
밀러는 그래서 이 작품을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경고’로 썼다. 우리가 누군가를 단죄할 때, 그 단죄의 열기가 과연 진실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안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려는 욕망인지 그는 묻는다. 더불어, 인간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회는 이미 영혼의 판단력을 잃은 것이라고 일깨운다. 시련이 남기는 가장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과거를 어디까지 들여다볼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이어진다. “누군가가 변화했는지 판단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외부가 아니라, 그 길을 걸어온 당사자다.” 문학은 종종 우리가 잊고 지내던 진실을 되살린다. 시련은 그 계기와 방향을 제공한다. 한 사람의 실수는 그의 전 인생을 규정할 만큼 무겁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이다. 우리가 이 단순한 사실을 잊는 순간, 세일럼의 불길은 다시 타오른다. 그것은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타임라인에서 일어나는 ‘현대적 시련’이다. 아서 밀러의 대사는 오늘도 조용히 경고한다.
“이 불길은 언제든 우리 안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 경고를 들은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누군가의 과거를 심판하는 데 급급한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길을 지켜 주는 것이, 진정한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