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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12월 02일(화) 16:19 가+가-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83세의 원로 연극인 박정자가 남긴 문장이다.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길 바랍니다.” 말도 덧붙인다. 그는 지난 5월 강릉의 한 해변이었다.
한 시대의 배우가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는 유언을 출연하는 영화의 장면과 함께 지인에 주는 부고장 문구다.
박정자 배우는 스스로 영화의 장면을 통해 장례식을 열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빨강 구두에, 밝은 조명을 받으며, 생전의 관객 앞에 섰다. 그 무대는 슬픔의 자리가 아니었다. 삶을 찬미하고, 죽음을 미리 맞이하는 ‘예술적 의례’였다. 그날, 사람들은 검은 옷 대신 웃음을 입었다. 누군가는 ‘죽음의 리허설’이라 했고, 누군가는 ‘삶의 축제’라 불렀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단 한 문장이 있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태도의 선언임을 느꼈다. 꽃은 예쁘지만 덧없다. 기억은 보이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꽃은 타인의 손으로 꺾여 온 생명이지만, 기억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피어나는 생명이다. 그녀는 자신을 추모하러 올 이들에게, ‘남김의 장식’이 아닌 ‘존재의 흔적’을 들고 오라고 말한 것이다. 꽃은 장례식의 상징이다. 죽음의 냄새를 덮기 위한 향기, 슬픔의 색을 완화하기 위한 장식. 그러나 그 꽃들이 시들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사람의 이름은 점점 잊히고, 남는 것은 영수증과 빈 화분뿐이다. 박정자의 요청은 이 전통적 의례에 대한 조용한 반문이었다. 꽃보다 기억을, 형식보다 마음을 원했다. “당신이 나를 떠올릴 때, 단 한 장면이라도 생생하게 가져오라”라는 뜻이었다. 무대 위의 나를, 대사를 잊은 순간의 웃음을, 혹은 무대 뒤편에서 떨던 그 손끝을. 인간은 기억을 통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가진 이유도,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기억의 일부가 손실되는 일이다. 박정자의 생전 장례식은, ‘죽음을 미리 연출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결코 유희가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건 앞에서, 마지막까지 주체로 서고자 하는 예술가의 의지였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당하는’ 일로 여긴다. 박정자는 그것을 ‘맞이’하는 일로 바꾸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 길마저도 무대처럼 꾸몄다. 죽음은 퇴장이 아니라, 마지막 커튼콜이었다. 죽음을 ‘연출’ 한다는 것은 삶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삶의 전 과정을 예술처럼 자각하려는 태도다.
그녀는 ‘끝’의 순간마저 연극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기억은 단순히 정보의 저장이 아니다. 기억은 관계의 재구성이다. 누군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그대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해석과 감정으로 새롭게 그린다. 그래서 기억에는 윤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잘못 기억한다. 어떻게 떠날 것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금을 충실히 산다. 기억은 관계의 언어다. 기억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기억은 죽음을 넘어서는 유일한 연대의 방식이다. 가끔 장례식장에서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한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웃는다. 한 사람이 떠났지만, 그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다시 그 자리에 있다. 이것이 기억의 기적이다. 기억은 망각에 맞서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책임의 형태로 남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함으로써 그 사람이 살아온 세계를 계속 이어간다. 그가 남긴 문장, 웃음, 친절, 미소 하나가 다른 사람의 내일 속으로 전이된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란 말은 죽음을 향한 요청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철학이다.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며 산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을 ‘잊지 않겠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방식을 내 삶에 옮겨놓겠다는 결심이다. 그가 웃던 방식, 말하던 온도,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씩 흉내 내며 살아가는 일. 그렇게 기억은 전염되고, 삶은 서로의 안에서 이어진다. 오늘 나는 누군가를 기억하며 걷는다.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에 오래전 목소리가 스민다. 그 목소리는 말한다. “나는 아직 너 안에 있다.” 나는 잠시 멈추어, 그 존재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꽃은 이미 시들었지만, 기억은 아직 향기로 남아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 기억이 따뜻한 빛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문장은 죽음의 문턱에서 태어난 말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생의 온기가 흐른다. 기억이란,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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