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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람의 얼굴을 만졌는가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10월 14일(화) 15:58 가+가-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느낀다. 머리칼을 스치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마음마저 흔들어놓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통과하는 존재, 그게 바람이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영화감독들은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잡아내려 애썼고, 결국 ‘바람’은 하나의 문학적 상징으로, 예술적 알레고리로 자리 잡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바람을 가장 인상적으로 제목에 녹여낸 작품 중 하나다. 마거릿 미첼의 이 장편 소설(1936년, 1031쪽)은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사랑과 욕망, 상실을 다룬다.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시대를 휩쓸어간 격변과 상실의 상징이다.
문명의 한 국면, 혹은 인간의 순진한 감정이 거센 바람처럼 휩쓸려 사라지는 것. 제목만큼 바람의 상징적 의미를 절묘하게 포착한 때도 드물다.
한국 문학에서도 바람은 자주 등장한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파아란 바람이 불어 가슴이 시렸던 날”의 바람은 차가운 현실이며, 내면의 외로움이다. 윤동주에게 바람은 체념과 고독을 전달하는 매개였다. 그가 살았던 일제강점기의 공기처럼, 차갑고 투명하며 말없이 스며드는 것.
김소월의 시에서도 바람은 이별과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감정의 운반자다. ‘진달래꽃’이 그렇고, ‘산유화’가 그렇다. 바람은 말 대신 시인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매개체다.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의 꽃과 함께 부는 바람은, 피고 지는 무상함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존재한다.
시가 바람을 감성적으로 품는다면, 영화는 바람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바다 마을 다이어리’에서 일본의 작은 해안 마을은 늘 잔잔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죽은 아버지, 남겨진 가족, 그리고 세월을 함께 감싸준다. 격한 감정 대신, 잔잔한 바람처럼 흘러가는 감정의 리듬은 관객의 마음을 서서히 흔든다.
‘바람’이라는 존재는 문학에서 종종 자유를 의미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서 바람은 국경을 넘어 다니고, 어떤 억압도 뚫고 지나간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지금은 부는 바람에 맞서라”라고 노래하며, 저항의 상징으로 바람을 사용한다. 보이지 않는 힘이기 때문에, 그만큼 강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바람은 항상 긍정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태풍처럼 무서운 손끝의 바람은 재앙을 몰고 오기도 한다.
이청준의 소설 ‘바람의 아이’는 바로 그런 무서운 바람을 그린다. 이 작품에서 바람은 정체불명의 두려움, 현실의 불가해함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바람은 자연의 얼굴을 한 운명이다.
바람은 ‘흔들림’이기도 하다. 삶이란 끊임없는 선택과 변화의 연속이며, 그때마다 우리는 흔들린다. 강한 뿌리를 지닌 나무처럼 굳건하려 해도, 바람 앞에선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문학은 이 흔들림을 ‘살아있음’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흔들림 없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기에.
바람은 문학이 아니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다. 대기압의 차, 지구의 자전, 해양과 대륙의 온도 차이가 만들어낸 물리적 현상.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바람이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감정까지 측정할 수는 없다. 사람은 여전히 바람이 불면 시를 떠올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난 사랑을 생각한다.
바람은 지나간다. 그것이 바람의 본질이다. 붙잡을 수 없고, 멈출 수도 없으며, 오직 ‘지나가게’ 둘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그 지나감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른다. 바람은 기억의 다른 이름이다. 지나간 순간들, 사라진 목소리, 잊히지 않는 얼굴들. 그런 것들이 모두 바람을 타고 우리 곁을 맴돈다. 이 순간,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디서 왔을까. 어쩌면 오래전 당신이 흘린 한숨이 바다를 건너 되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먼 나라의 누군가가 속삭인 시 구절이 이곳까지 날아온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바람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문학은 다시 태어난다.
바람은 우리 곁을 스치지만, 가볍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자 감정의 통로이며, 흔들리는 인간 존재 자체를 닮았다. 우리는 늘 바람 속에 있고, 바람과 함께 삶을 건너간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수많은 바람의 문장들은 계속 쓰이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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