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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철학적 지혜
김양용 철학박사
작성 : 2025년 08월 31일(일) 15:28 가+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기후시계(climatelock)를 보라. 베를린과 뉴욕, 서울과 창원 등에 설치되어 지구의 기온이 산업혁명(1880년대) 이전보다 1.5도 상승까지 남은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다. 우리에게 보여준 시간은 ‘3년 340일’이다. 이 시간은 인간과 생물의 대멸종이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일깨운다.
‘홀로세는 끝났다. 우리는 새로운 지질학 시대인 인류세를 살고 있다’ 2000년 지구 시스템 학술회의에서 노벨 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 교수의 외침이다. 지구의 나이 46억년 중 빙하기(약 1만 1700년 전)에서 현재까지를 ‘홀로세(Holocene Epoch)’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 파괴가 빚어낸 새로운 지질시대가 바로 ‘인류세 Anthropocene Epoch’다. 인류는 매년 600억 마리 닭을 도살하고, 5200만톤의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 콘크리트로 지구 표면을 뒤덮었으며, 방사능과 탄소 발자국을 남겼다. 이러한 인류세가 과학자들은 물론 사회 전반에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물의 한 종에 불과한 호모사피엔스가 자신의 행성을 망치고, 마침내 ‘생물종의 대멸종’이라는 참혹할 결과를 빚을 것이라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더구나 여섯 번째 대멸종이 과거와 달리 식물종에 집중된다고 하니 녹색별 지구의 미래가 암울할 뿐이다. 관련하여 ‘총, 균, 쇠’의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남은 시간을 50년으로 꼽는다. 이것이 문명의 붕괴 시간이다. 이에 대해 다양한 방책이 제시되고 있다. 무엇보다 자연·인간의 이분법 해체를 통한 지구공동체 회복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류세’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철학적 성찰이 요구되며, 나아가 인류세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정말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위기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아는 것이 힘일까?’ 베이컨에게 ‘안다’는 것은 자연을 ‘하나의 전체’가 아닌 차가운 기계 장치,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베이컨식 자연 정복의 전략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자연을 도구화하고, 지배 대상으로 삼는 그의 철학은 <신기관>에 집약되었다. 이로부터 인간은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달콤한 환상이 뿌리내렸다. 따라서 우리의 철학적 사고는 자연에 대한 소유와 이기심의 발현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인류세’가 어떻게 소유, 이윤, 경쟁 기반의 자본주의로 나아갔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우리의 철학적 성찰의 기반은 전통의 지혜에 있다. 오랜 세월 자연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면서 형성되어 우리 내면에 온축된 생명 애착심(eco-philia). 그것은 이기적 속성을 넘어선 공동선의 추구와 인간적 공동선에 기초한다. 그런데 소위 관계와 공감 능력으로서 공동체 정신이 어떻게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을 해체할 수 있을까? 그 해법은 인간 자신의 문제를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하나의 전체로 여겼던 조상들의 사유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게 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념, 지식, 실천을 쌓아왔다. 이는 전 세계의 각 민족과 공동체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인류세에 대한 철학적 지혜는 인간의 시대가 안고 있던 인간 중심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는 동양의 도가나 기철학, 불교나 힌두이즘은 물론 아프리카 철학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프리카 반투족 등 수백 부족들의 세계관으로 ‘우분투(Ubuntu)’ 정신이 있다. 이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는 공동체적 인간성을 강조하는 격언이다.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기에 존재하는 인간’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반투족의 격언을 지구적 차원으로 변용하면 ‘자연이 있어야 인간도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 조상들도 ‘천지가 우리의 부모요, 만물은 우리의 동포’라는 세계관과 ‘만물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고 여겨왔다.
새로운 차원의 사유와 삶의 패러다임을 통하여 기후위기와 대멸종의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인류세’를 넘어설 희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제인 구달은 그 희망을 청년들의 각성과 실천에서 찾았다. 그렇다. 기성인들의 고착화된 인간 중심의 우매함보다는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그럼에도 당장 삶의 주도권을 가진 기성인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에게 내재된 생명 애착심과 생태적 양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위기에 처한 지구 생태계에 대한 공감 능력은 후천적 배양도 가능하지만 각자 내면의 것이 물적 욕망으로 무뎌진 상태를 회복하는 일이 훨씬 효율적이다. 양심은 포유류에 나타나는 심성이라지 않는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연구팀에 따르면 설치류인 생쥐도 배고파 신음하는 친구들을 외면하고 혼자 먹지 않으며, 쓰러진 친구를 위해 응급조치까지 한다. 하물며 만물이 영장이라는 인간이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없겠는가? 자신의 행위가 행성을 망칠 정도라면 반드시 자신의 양심을 끌어내야 한다. 멸종위기에 처한 북극곰은 ‘나부터 강물까지, 바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생명체다. 더 이상 수동적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와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 ‘부자 되세요’라는 슬로건이 유행하였다. 이것이 미국 레이건의 슬로건이었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이제라도 자연 지배의 정점에 있는 물질주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이 지구의 한계 안에서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 진정으로 ‘인류세’를 넘어서기 위하여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며, 정복자가 아니라 돌봄이어야 한다는 철학적 지혜에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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