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지 않은 것들의 소중함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08월 26일(화) 15:55 가+가-

“하찮다 이름 붙인 것들의 어깨 위에서/세상은 오늘도 천천히 돌고 있었다.”
우리말에서 “시시하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띤다. 하찮고, 지루하며, 별 의미 없는 것을 가리킬 때 흔히 이 단어를 쓴다. “시시한 농담”, “시시한 인생”, “시시한 하루.” 그 속에는 대개 허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삶을 조금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시시하다고 여기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가장 근본적인 것들이다. 새벽의 공기, 아침 햇살, 밥 한 숟갈, 웃음 한 조각, 손끝의 따스함. 그 단순하고 평범한 것들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시시하지 않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큰 성취나 특별한 사건만을 추구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작은 것 안에서 무한을 보고, 흔한 것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하며, 하찮음의 틈새에서 영원을 만나는 일. 그것이야말로 삶을 시시하지 않게 만드는 길이다.
“작은 풀잎 하나에 숨은 하늘/바람의 귓속말에 묻힌 영원의 조각.”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는 일상성 속에서 드러난다”라고 말했다. 그의 사유를 빌리자면, 우리는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일상 속에서 존재의 진실과 마주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한다.
광고는 ‘특별함’을 외치고, SNS는 ‘대단함’을 과시하며, 미디어는 ‘극적인 사건’만을 부각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매일의 순간을 하찮게 여기며, ‘더 큰 것’을 찾아 방황한다. 하지만 진정 위대한 것은 거기 있지 않다. 한 아이의 웃음에서, 노인의 주름에서, 길가의 들꽃에서, 끓는 국물에서, 우리는 창조의 신비를 본다. 그 순간들은 절대 시시하지 않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을 놓칠 때 인생은 공허해진다. 문학은 오래도록 이런 사소함의 위대함을 포착해왔다.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와 같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고, 보들레르는 도시의 일상적 풍경 속에서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발견했다. 우리 시인들의 눈길 또한 그러하다. 윤동주는 밤하늘의 별빛을 따라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걸어 두었다. “하루는 흘러가도,/그 하루의 무늬는 영원에 남는다.”
“시시하지 않게” 산다는 것은 곧 영원의 감각을 갖는 일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묶여 있지만, 시인은 그 시간 속에서 영원을 감지한다. 흐르는 강물은 늘 같은 듯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지속’은 영원의 은유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은 반복 같으나, 그 반복은 영원의 증거다. 성경에서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고 고백했지만, 동시에 매 순간은 하늘 아래 새로운 빛을 발한다. ‘시시하지 않음’은 바로 그 이중성을 꿰뚫는 눈길이다. 시간 속에 살면서 영원을 감지하는 것, 순간을 누리면서 무궁을 느끼는 것.
여기서 우리는 ‘존재의 무게’라는 개념에 닿는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벼움과 무게를 대조했듯이, 삶은 어느 쪽에 기울든 불안하다. 그러나 삶이 진정으로 시시하지 않으려면, 존재는 ‘적절한 무게’를 지녀야 한다. 매 순간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이 영원에 접속되어 있다는 감각을 가지는 것. 그 무게야말로 시시하지 않은 삶의 표징이다.
“겨자씨 같은 믿음 하나,/두 렙돈 같은 헌신,/거기서 하늘은 문을 연다.”
‘시시하지 않음’의 문제는 단지 미학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이는 깊은 울림을 준다. 시인 또한 같은 눈을 가진다. 세상 사람들은 무시하는 그 순간에 귀 기울이고,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들에게 말을 건다. ‘시시하지 않음’의 길에서 서로 맞닿는다. 신앙은 작은 것에서 거룩함을 보고, 시는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결국, 둘 다 시시하지 않은 삶의 감각을 열어 준다.
“오늘의 숨결에 귀 기울이라,/어제는 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다./오직 오늘이 시시하지 않은 선물이다.” 우리는 어떻게 시시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이는 거창한 방법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며 감사하는 것, 오늘 하루의 숨결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것,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것, 사소한 기쁨에 온전히 웃는 것.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탄생성(natality)’에서 찾았다. 매 순간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며, 그 새로움은 절대 시시하지 않다. 따라서 매일의 삶을 새 생명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시시함을 모른다.
“내 발자국이 남긴 길 위에/누군가의 삶이 자라날 수 있다면/그것으로 충분히 시시하지 않다.” 결국 “시시하지 않게”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거룩한 시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거대한 영웅담이 아니라, 작은 순간들의 기록 속에서 인생은 장엄한 서사가 된다.
존재의 무게를 붙들고, 영원의 감각을 품으며, 매일의 호흡을 기쁨과 감사로 채워 나갈 때, 그 어떤 삶도 시시하지 않다. 다짐한다. 시시하지 않게. 그러나 억지로 무겁지도 않게. 내 존재의 무게만큼만 충실히. 그것이 시인의 길이며, 또한 인간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