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08월 19일(화) 16:00 가+가-

여름의 뜨거움이 서서히 꺾이고, 바람 속에 선선함이 묻어나는 8월 하순, 문득 밤을 열면 귀뚜라미의 맑은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단순한 곤충의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계절의 교차점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을의 첫 번째 편지이며,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리는 작은 현악기의 선율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깨우고, 시간의 흐름과 덧없음을 일깨운다.
문학에서 가을은 늘 성찰과 고독, 그리고 수확과 성숙의 이미지로 자리했다. 봄의 약속과 여름의 성장, 겨울의 침묵과 달리 가을은 ‘결실과 이별’을 동시에 품은 계절이다. 귀뚜라미의 소리는 바로 이 계절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생명의 가장 뜨거운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마무리와 수확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노래다.
한국 시에서 가을은 자주 등장하는 계절이다.
김소월은 「가을 저녁에」에서 “쓸쓸한 저녁노을에 / 우는 새소리”를 노래했고, 정지용은 「향수」에서 고향의 들녘을 가을빛으로 채워 넣었다. 박재삼은 가을을 “쓸쓸히 타는 등불 같은 계절”로 묘사했으며, 김춘수는 가을의 시학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간”으로 불러냈다.
귀뚜라미는 특히 시인들에게 밤의 상징적 존재로 그려졌다. 고향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이자, 고독을 더 깊게 만드는 울음이었다. 밤마다 들려오는 이 작은 곤충의 노래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허무와 그리움’을 자극한다.
귀뚜라미의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연결된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바쁜 삶 속에서 ‘잠시 멈춤’을 요구한다.
가을에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인생의 덧없음과 함께 깊은 평안함이 찾아온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규정하면서,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를 강조했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소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라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유한함을 느끼며, 동시에 그것을 수용하는 법을 배운다.
서양의 시인들 역시 가을을 ‘성찰의 계절’로 노래했다. 영국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가을에게(To Autumn)」에서 “가을은 가장 성숙한 계절, 결실의 풍성함으로 가득한 시간”이라 했다. 귀뚜라미 소리와 같은 작은 자연의 음성도 키츠에게는 삶의 영광을 완성하는 교향곡의 한 부분이었다.
T.S. 엘리엇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가을을 죽음과 소멸의 계절로 그리며, 인간의 불안과 문명의 허무를 노래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을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맺음이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오는 어두운 밤은, 어쩌면 봄을 위한 씨앗을 준비하는 시간일지 모른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계절의 감각과 시적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마트폰의 인공 음과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한밤중의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작은 곤충의 울음은 인간의 영혼을 깨운다.
우리는 이 소리를 들으며, 시를 다시 생각한다. 시란 거창한 언어의 장식이 아니라, 작은 울음소리와 바람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붙잡는 행위다. 귀뚜라미 소리가 시가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계절과 하나 되고, 삶과 화해한다.
귀뚜라미 소리는 곧 사라질 것이다. 찬바람이 깊어지고, 겨울의 침묵이 세상을 덮으면, 우리는 더 이 맑은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가을의 기억’이 남는다.
시란 바로 그런 기억의 예술이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 흘러가는 것을 노래하며, 우리 마음의 한가운데에 영원히 남게 한다.
귀뚜라미의 울음에서 우리는 가을의 시를 듣는다. 그것은 인간의 덧없음에 대한 노래이자, 동시에 존재의 깊이를 새겨주는 축복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