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소환한다
김양용 철학박사
작성 : 2025년 07월 13일(일) 15:53 가+가-

올여름 지구촌의 폭염과 열대야가 심상치 않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곳곳이 섭씨 40도를 넘는 소름 돋는 폭염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밀양 지역이 낮 최고 39.2도를 찍었다. 그러나 아직 7월 중순이다. 이대로 가면 한반도의 여름도 기상관측 이래 최고 기록이 될 것이다. 대책은 무엇인가? 이미 때가 늦은 것이 아닐까? 이때는 냉정하게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지구적 위기인가, 국가적 위기인가? 그러나 대부분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매여있는 국가에게 위기대응의 책임과 권한을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겐 ‘생명의 지속’과 ‘생태적 삶으로의 대전환’이라는 타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태문명’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워 세계관(패러다임) 전환에 몰두하기에는 ‘티핑포인트’가 목전에 있다. 이 점에서 국가 차원의 ‘탄소중립’이니 ‘RE100’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매달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기후위기는 다양한 사회와 국가,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얽힌 복잡한 문제라서 철학과 과학, 경제 등 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에 대한 현실적 실천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그간 기후 대응의 교훈,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문제, 그린 뉴딜과 제체의 전환, 그리고 유기적 연대의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진단에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류는 위기에 대한 실질적 대응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후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세계는 국제 협약을 맺고, 실천에 나섰지만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못했다. 지금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매년 2.3ppm씩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부정의와 무책임이다. 그만큼 시장과 이윤의 논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자본 지배하에 놓였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배출권 거래제’다. 이는 CO2 1톤당 배출권에 가격을 매겨 기업들이 시장에서 거래함으로써 가격 압력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협약 자체가 화석연료 기업들과 해당 정부의 압력으로 누더기가 되었고 심지어 기업들은 정부 로비로 값싼 배출권을 사들여 배출 총량을 줄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더구나 할당량 초과 국가들이 경제 위기로 배출이 감소한 나라의 배출권을 사들이는 촌극도 벌어졌다.
다음으로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내놓은 기후 위기에 대한 분석이 아전인수식이다.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도 기후변화가 세계 자본주의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지만, 기후위기 대응이 단순히 온실가스 감축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문제가 숨어있다. 생계를 위해 뙤약볕을 마다 못하는 저소득 노동자들의 얘기다. 에어컨 아래서 근무하고, 에어컨이 켜진 집으로 퇴근하는 다른 직종의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불평등한 일터인가? 더구나 부채와 선풍기에 의존하여 찜통더위와 맞서야 한다. 이는 위기의 피해가 소외된 저소득 국가나 공동체에 집중된다는 ‘기후정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기후정의를 실현할 방도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체제의 유력한 기후 위기 대응 목표는 ‘탄소중립’과 ‘넷제로’다. 탄소중립은 기후위기 대응의 주요 목표지만, 이는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입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 점에서 탄소중립을 추구하는 정책이란 과학기술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자본 세력의 입장을 강화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결국 탄소중립의 추구는 기후위기와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불평등의 해결이 아닌, 이를 초래한 자본주의 정치 경제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다. 더구나 급격한 기후변화는 폭염, 산불, 전염병 등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키울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체제가 요청된다.
‘그린뉴딜’은 미국 크리드만(「그린코드(Code Green)」)의 조어로서 샌더슨 등이 자본주의 ‘체제 전환 전략’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재생에너지와 자원효율성 향상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미국과 유렵의 정책이자유엔이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경제 모델이다. 즉 기후 위기도 극복하고 경제도 성장하는 친한경 경제 성장 전략으로 국유화와 공공투자 등 국가 개입을 전제로 한 ‘생산의 사회화’를 통하여 ‘자연 침해의 종식’으로 나아가는 체제 전환이다. 그러나 최근 두산중공업의 경우처럼 화력발전의 수익성 급락이 노동자 750명 명퇴(해고)로 이어졌다. 따라서 RE100 등 에너지 전환에 수반되는 대량 해고 등을 방지할 ‘정의로운 전환’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당면한 기후 위기는 국가적 위기인가?를 물어야 한다.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은 근대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머물기 일쑤다. 그러나 시장과 자본이 낳은 위기는 자연재해라는 추상적 이해를 걷어내야만 우리의 목표인 자본주의의 극복, ‘생명의 지속’과 ‘생태적 삶으로의 대전환’을 맞을 수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국가적 분석은 자본지배라는 한계를 안고 있기에 어느 한 가지, 예컨대 ‘국가적 목표’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패러다임)의 전환’만을 붙잡는다고 해결되지 못한다.
단위 국가가 내세우는 ‘탄소중립’이니 ‘RE100’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자. 그만큼 기후위기는 근대성의 적응과 극복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와 국가,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얽힌 복잡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간이 다양하게 경험하는 기후위기를 일상의 현실로 인정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위기의 극복’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수많은 탄소저감 세포들을 가로질러 유기적 연대를 꾀해야 한다. 우리의 면류관인 ‘생태문명’이라는 거창한 좌우명을 걸어놓기에는 ‘티핑포인트’라는 빨간 등이 불길하게만 보인다. 지금 당장 행동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