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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의 시선이 혜화동에 머문 까닭은?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07월 01일(화) 15:52 가+가-
시성(詩聖), 타고르의 흉상을 대학로에 가면 만난다. 안창호 기념재단인 흥사단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 우연스럽다. 인도인이 한국에 오면 더러는 타고르의 흉상 앞에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촬영으로 끝이 아니다. 흉상을 손으로 공손하게 만지기도 한다.
시도반은 그들의 따뜻한 태도에 인도에서 타고르는 어떤 존재냐고 물었다. “타고르는 인도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인도국가를 작사 작곡도 했다며 존경스럽다”라고 한다. 타고르는 인도(작사, 작곡)와 방글라데시(작사)의 두 개의 국가(國歌)를 만든 세계에서 유일한 인물이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흉상은 2011년 5월 18일 대학로에 세워졌다. 단순한 조형물 하나가 아니라, 그 뒤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깊은 인연이 새겨져 있다.
타고르는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1929년, 일제 강점기의 한국을 위해 시를 썼다. 바로 「동방의 등불」이라는 작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조선 /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그의 이 네 줄의 시는, 짧지만 깊다. 조선이 처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연민, 민족의 잠재된 영광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그는 조선을 과거의 영광을 잃은 나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타오를 등불로 보았다.
이 시는 1929년 4월, 조선의 잡지 『개벽』에 실렸다. 인도 벵골 출신의 시인이, 왜 머나먼 조선에 대해 시를 썼을까? 배경엔 타고르의 동양에 대한 사상과 일제하 조선의 현실에 대한 공감이 있었다. 타고르는 동양 정신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역설했다. 물질 중심의 서구 문명에 반기를 들며, 동양의 내면적 깊이와 정신성을 높이 샀다.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던 그는, 조선 현실에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했다.
타고르의 철학은 “세계는 하나이며, 문화는 교류 속에서 피어난다”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문인이 아니었다.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으며 동서 문명 사이의 가교가 되고자 했다.
타고르가 식민지 조선에 대해 품은 애정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인도 역시 당시 영국 식민지였다. 그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간디와도 철학적 대화를 이어가던 인물이었다. 한국과 인도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지만, 같은 상처를 지닌 민족이었다.
서울 혜화역 근처에 세워진 그의 흉상은 그런 공감의 증표다. 2011년은 타고르 탄생 15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인도 정부는 전 세계 여러 도시에 그의 흉상을 기증했고, 한국은 그 중, 하나의 장소가 되었다. 마로니에 공원은 예술가들의 숨결이 흐르는 공간으로, 타고르의 정신과 잘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옆에는 김광균 시인의 시비도 있다. 함석헌, 안창호 선생의 어록도 있다.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은 이후 오랫동안 한국인의 마음속에 남았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시를 마음에 품었고, 해방 후에도 교과서에 실려 많은 이들이 암송했다. 한 외국인의 예언적 시구가 이처럼 오랜 시간 영향을 끼친 예는 드물다. 일부에서는 남산에 타고르의 동상을 세우자는 여론도 있다.
2025년 현재, 혜화역을 지나는 이들이 타고르의 흉상 앞에 잠시 멈춰 선다면, 단지 조형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시선 속엔 조선의 미래를 믿어준 한 외국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한국과 인도는 오늘날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관계의 시작엔 문학과 정신의 교류가 있었다. 문명 간의 진정한 우정이란, 이런 깊은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는 그 문장 속에 담긴 믿음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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