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말 대신 마음에 닿는 말, 외래어 없는 우리말 가능할까?
최창일 시인·<시원의 입술>저자
작성 : 2025년 06월 10일(화) 15:55 가+가-

텔레비전 뉴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각종 유튜브 방송을 틀어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사안은 결국 거버넌스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오늘은 ESG 경영의 뉴 패러다임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전문 용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쉽게 와닿는 말도 아닌 외래어들이, 뉴스 진행자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과연 시청자는 이 말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23년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응답자의 67%는 방송 언어 중 외래어 사용이 “불편하다”고 답했다. 신조어나 약어, 외래어가 뒤섞인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헬스케어”, “인사이트”, “모멘텀”, “소셜믹스”, “컨센서스” 같은 말들은 그저 ‘외국 냄새 나는 어려운 말’로 들릴 뿐이다.
이런 용어들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통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에서까지 일상적으로 쓰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외래어는 전달력을 약화시키고, 방송 언어의 포용성과 공공성을 해친다.
한 지상파 저녁 뉴스에서 “직장인의 워라밸을 위협하는 회식 문화”라는 표현이 반복되었다. 이때 기자가 말한 ‘워라밸’은 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사실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이다. 왜 굳이 줄임말을 만들어내야 했을까?
‘워라밸’이라는 말은 젊은 세대 일부에 익숙할지 몰라도, 방송은 온 국민이 함께 보는 매체다. 적어도 뉴스에서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순우리말 표현으로 바꿔 쓰는 것이 전달력도 좋고, 세대 간 언어 격차도 줄일 수 있다.
교양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인사이트”다.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준다”, “이 다큐멘터리는 인사이트가 뛰어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통찰”, “통찰력”, “깨달음”, “생각할 거리” 등 다양한 우리말 표현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준다”라고 말해도 의미 전달에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더 깊이 있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과 일본의 반응 노컷 제목이다. “일본 반응…”이재명은 반일 몬스터“다 몬스터는 사람이 아닌 생명체를 이르는 괴물을 뜻한다. 왜 이렇게 외래어가 넘쳐나는가? 첫째, 외래어를 사용하면 더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둘째, 업계나 학계의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면 전문성이 부각 된다는 착각도 작용한다. 셋째, 외국에서 들어온 개념이 아직 우리말로 완전히 자리 잡지 않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 반드시 좋은 말은 아니다.
방송과 언론이 말의 겉치장보다 ‘속뜻 전달’을 우선한다면, 더 쉬운 말, 더 마음에 닿는 말이 선택돼야 한다.
KBS 라디오는 ‘우리말로 말해요’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다. 그 목적으로 “카풀(carpool)”이라는 단어 대신 “함께 타기”, “리포트(report)” 대신 “보도”, “리스크(risk)” 대신 “위험 요소”라는 순화어를 사용했다.
초기에는 어색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말이 쉽게 들린다”라는 청취자의 긍정적 반응이 늘어났다.
이처럼 방송 언어의 변화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체어를 고민하고, 원고를 쓸 때부터 한 번 더 우리말로 바꿔 생각해보는 노력. 그게 바로 언론의 말 문화 개선이다.
외래어 사용이 불가피할 경우, 설명을 함께 적으면 된다.
예컨대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경영, 즉 환경과 사회, 기업 지배구조를 고려한 경영 전략이…”처럼 말이다. 설명만 덧붙여도 훨씬 이해가 쉬워진다.
외국의 BBC, NHK 등 공영방송은 자체 언어 기준이 엄격하다. 한국의 방송사들도 외래어 사용에 내규를 강화하고, 편집자와 아나운서에게 정기적인 언어 교육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디폴트(default)”는 “채무불이행”으로, “커넥션(connection)”은 “연결”, “인프라(infrastructure)”는 “기반 시설” 등으로 표준화해 사내에서 공유할 수 있다.
말은 시대의 거울이자 마음의 다리다.
외래어가 범람하는 방송 언어는 그 다리를 오히려 끊어버리는 행위다. 방송이 지향해야 할 언어는 멋진 말이 아니라 ‘전해지는 말’이며, 뽐내는 말이 아니라 ‘들리는 말’이다.
우리는 방송이 정보 전달뿐 아니라 문화 전달의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며, 우리말은 우리 문화의 숨결이다. 지금이라도 낯선 말 대신 마음에 닿는 말을 찾는 방송, 그 노력은 절대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