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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는 신비적 유토피아인가?
김양용 철학박사
작성 : 2025년 04월 13일(일) 15:27 가+가-
역사는 시련과 위기를 맞이한 자들에게 그들의 치열한 응전과 저항에 대한 대가로 언제나 새로운 변화와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미완의 존재인 인간으로서 완벽한 민주주의는 유토피아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하며 이상적 사회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 심지어 과학기술 지상주의 테크노피아(technology utopia)도 그렇다. 모든 것은 ‘옴살스럽게’ 상호작용하면서 자기 조직을 해나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생태적 사유 즉 생태주의라고 부른다.
최근 세계적 이슈는 단연 AI와 기후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한국의 현주소는 어떤가? 학계에 따르면 한때 인터넷 세계 1위였던 나라가 작년 말 현재 AI와 IT산업 분야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나 리더들의 의식지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기후 문제 역시 2016년 이래 수년째 ‘기후 악당’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해외 화석연료 사업에 대한 막대한 공적금융 지원으로 작년 11월 COP29에서 ‘오늘의 화석상’ 1위를 수상한 것이다. 기후변화의 책임이 크면서도 대응에 무책임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생태계 파괴에 앞장섰으니 ‘생태 악당’인 셈이다.
시대, 문명의 전환을 꿈꾸는 생태주의는 인류가 실현할 수 없는 신비적 유토피아인가? 유사 이래로 인류의 자기 극복의 의지는 19세기 산업혁명을 일궜고, 이로 인한 여러 위기를 단순한 기술 발달이 아닌 사회의 근본적인 전환으로 치유하려는 생태주의를 낳았다. 유토피아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으로 토마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에서 유래한 말이다. 소설 속의 유토피아 ‘섬’은 휴머노이드가 아닌 이상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일 뿐이다.
20세기 과학기술이 지향하는 진보의 유토피아가 ‘성장의 한계’(Club of Rome)를 고한다. 이로부터 철학과 종교, 문학이라는 인문학을 필두로 ‘오래된 미래’인 유토피아적 생태주의를 소환하고, 급기야 생활 속에서 생태계 파괴를 차단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생태사회를 지향한다. 이른바 현실주의적 생태주의로서 ‘생태 문명’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생태 문명’하면 의례 생태주의 사상가 김종철(1947~2020)을 떠올린다. 필자와의 인연은 20여년 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고김용업의 추천으로 녹색평론을 구독하면서부터다. 영문학자였던 그가 생태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동독 출신 녹색 사상가 루돌프 바로의 “핵무기에 반대하려면 먼저 뉴욕시를 질주하는 자동차 문명에 반대해야 한다”는 말에서 받은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그는 구체적 현실에 바탕을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 주목하여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하여 2020년 172호까지 29년 동안 이어진다.
김종철 생태사상의 현실주의적 성향은 인생의 모든 단계, 모든 국면에서 우리의 삶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되거나 뒤틀리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자본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제 도입과 소농 체제로 전환을 주장한다. 지금처럼 경제성장에 매달려서는 기후변화와 생태계 멸절에 따른 인간 파괴를 막을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으로 생존과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경쟁의 절박함이 완화되고, 자본이 지배하에 있는 공동체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지구의 유한한 자원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사회를 농촌 중심으로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농업 중심 사회로 회귀해야 한다는 단순한 발상보다는 산업 자본에 종속된 ‘농업’의 사슬에서 벗어나 ‘온살림’으로서 ‘농촌 공동체’와 나아가 생명 중심 사회의 복원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는 정치 제도에서도 기존 대의민주주의 대신 시민의회가 중요 문제를 결정하는 숙의민주주의를 제안한다. 그만큼 근대 이후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인 의회민주주의가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고 있다는 통찰이다.
우리 사회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12·3 쿠데타와 내란의 종식을 향해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내란의 우두머리’를 끌어내린 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 사회 저변에 독버섯처럼 자란 ‘엘리트주의’라는 강자 독점과 자본 독재의 파시즘은 더욱 친절한 이웃으로 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새로운 희망, 제7공화국을 우리가 만들어가는 일이다. 여기에 AI와 휴머노이드의 세상도 중요하지만 민중들의 정신적 근육을 강화시키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희망의 7공화국에서는 19C 헨리 소로의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삶’이라는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더 이상 생태계 파괴를 묵인하지 말고, 부디 ‘생태 악당’이라는 오명을 씻어내야 한다.
12·3 내란의 위기 극복은 ‘우두머리 제거’도 중요하지만, 그 근저에 자리한 엘리트 집단의 파쇼적 카르텔을 도려내야 하듯, 생태문명의 전환 또한 자본 중심의 근대적 패러다임을 도려내야 한다. 제7공화국을 맞이하는 대변혁의 기회에 우리 사회를 자본 지배의 사회에서 생태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말이다. 생태학적으로 지구가 훼손되고 파괴되어 가는데, AI와 테크놀로지가 더 이상 자본의 진보에 매몰되지 말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치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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