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
김양용 철학박사
작성 : 2025년 01월 19일(일) 16:17 가+가-
신학자 린 화이트(Lynn T. White, 1907~1987)의 주장대로 기독교는 오늘날 생태위기의 역사적 뿌리인가? 우리는 1860년 지구의 온도에 대한 측정이래로 가장 더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미국 해양대기관리국 톰 카를은 “1880년 이래로 기온이 가장 높았던 해 다섯이 모두 1990년대 이후에 속한다”면서,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하였다. 문제는 지구가 인간들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기후위기’, ‘생태적 위기’라 말한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100가지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6050만평의 사막을 만들어 내며, 1억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최종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면 이러한 재앙의 역사적 뿌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사회학자 헬무트 두비엘이 “가장 지독한 곤경을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것은 결국 인간 작품이다”고 한 것처럼 위기의 원인은 대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식과 행위에서 온다. 인간의 자연관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산업혁명은 근대 서구과학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서구과학의 근저에 기독교의 자연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화이트의 관점이다. 자연이란 인간을 섬기는 것 이외에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과연 창조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대지를 망가뜨리려 하였을까? 이것이 지속가능성의 원형을 성서 속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관심사다. 독일의 철학자 프란츠 알트(Franz Alt,1938~)는 예수야말로 창조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이 땅을 만들기 위해 크고 작은 실천에 나선 삶의 원형이라고 보았다. 성경적 사고에서 생태계 위기 극복을 위한 쟁점은 ‘성서적 인간 이해’와 ‘청지기로서의 소명’,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해방’으로 보인다.
땅의 경작과 관리를 강조한 성서적 세계관(창1-28)은 세속적 인간 중심이 아니라 신의 뜻과 명령에 따르는 종교적 가치의 회복과 생태적 책임을 강조한다. 신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지적한 화이트의 성서 오해는 바로 ‘자연에 대한 도구적 해석’에 있다. 이는 창세기 본문의 ‘야라쉬’(히, 관리하다)를 ‘취하다’, ‘점령하다’로 해석함으로서 마치 인간에게 수탈을 허용한 것처럼 본 것이다. 실제 성경은 ‘수탈의 면허증’과는 거리가 먼 자연에 대한 ‘존중과 보호의 의무’를 강조한다. 무엇보다 성경적 사고의 본질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원성(duality)에 있으며, 창조의 세계인 자연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결코 인간의 수탈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피조물로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모든 생명은 창조주에게 소중하다’는 차원에서의 ‘존엄성’을 가진 그런 존재이다.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은 ‘청지기’로서 소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때 ‘청지기’란 세속적 의미의 직업이나 소득, 금전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화이트가 말하는 과학 정신이나 수탈적 ‘테크놀로지 정신’이라기 보다는 자연에 대한 수탈을 경계하는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 결국 성서적 의미의 ‘청지기’로서 인간은 스스로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을 책임있게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는 무한 경쟁과 착취,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체제를 말한다. 성서적 사고에서 시장 경제란 생태계로부터 선물 받은 물질과 에너지로 돌아간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데 있다.(강원돈)
이것이 오늘날 시장 경제에 대한 신학적 진단이다. 곧 ‘지나친 불평등’을 자본주의 근본 문제로 보고,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윤리의 강령은 사실 자본 독재와 금융 수탈에 허덕이는 인간 해방의 길이며, 생태위기 극복의 윤리적 대안인 셈이다. 이것이 예수가 추구한 생태계 수탈의 방어책으로서 생태와 경제의 균형의 길이다.
성서의 생태적 이해는 성경적 사고와 세계관의 본질에 기반하여야 한다. 화이트가 창세기 구절을 세속적으로 해석하여 기독교를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로 간주한 것은 기독교의 생태운동을 더디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자연의 수탈자로 간주하는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연의 청지기로서 ‘존중과 보호’라는 적극적 책무를 깨우쳐야 한다. 나아가 프란츠 알트의 지적처럼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소명을 실천한 생태주의자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자본독재의 해체와 생태계 수탈의 방어망을 구축해야 한다.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시군별뉴스

오피니언

기사 목록

대한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